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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백편의자현/詩로빚어낸마음

생명과 생명이 만나 소통하다 … 백석「수라」

거미가 내 창문 앞에 거미줄을 치고 있다. 언제 쳤는지 꽤 단단한 거미줄을 만들었다. 거미줄을 걷어 버릴까 하다 백석의 「수라(修羅)」가 생각이 나 시커먼 거미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냥 그렇게 계속 놔둘 수는 없으나 정성스레 친 거미줄을 한순간에 파괴해버리는 것이 내키지가 않았다. 하기야 「수라」를 읽고 나서 거미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평소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거미’를 친숙한 존재로 만들어 주고 있는 백석의 「수라」를 읽어 본다.

 

정본 백석 시집

백석 | 고형진 역
문학동네 | 2007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날인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벌인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벌이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설어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 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서진 곧으로 와서 아물걸인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올으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 벌이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곻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벌이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맞나기나 했으면 좋으렸만 하고 슳버한다

 

 

 


‘나’는 방바닥에서 처음 거미를 만났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거미는 방 안에 있어서는 안 될 귀찮은 존재, 버려야 할 존재인 것이다.

 

새끼 거미가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나타났다. 혹시 그 거미가 그 새끼 거미를 찾으러 나온 어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미 거미의 처지에 가슴 아파하며, 차디찬 바깥이라도 새끼 있는 곳으로 가라며 서러워한다. 단순한 거미에 불과했던 새끼 거미가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그 거미를 염려하는 어미가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큰 거미를 치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마리의 거미가 나타난다. 거미를 향한 그의 공감은 한층 더 깊어진다. 그는 이제 ‘연민’을 넘어 거미와 친밀한 소통을 시도한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며 거미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거미는 아무 생각 없이 쓸어버릴 수 있는 존재에서, ‘나를 무서워하며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나’는 이 작은 거미를 그냥 쓸어버릴 수 없어 보드라운 종이를 준비하고, 거기에 고이 담아 문밖으로 보낸다. 세 가족이 다시 만나기를, 무사히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기를 기도하면서.

 

한갓 ‘미물’에 불과했던 거미는 어느새 소통과 교감의 대상으로 변모하여 ‘나’의 닫힌 마음을 열게 했다. 세상 무엇이 이토록 한 인간의 마음을 드라마틱하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던 ‘인간이 아닌’ 무엇이 감동적인 구원의 제스처로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 같다. 오늘만은 우리와 똑같은 무게의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소중한 존재로서 거미를 바라본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문밖은 차디찬 밤이고 ‘나’의 쓸어버리는 행위는 거미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데 ‘나’는 이를 반복하고 있다. 이것이 모질게 보이지만, ‘나’는 따뜻하지만 외로운 방보다는 춥고 위험하지만 가족들이 있는 문밖이 거미들에게는 더 나을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여기에는 1930년대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고난의 시기, 가족이 함께 하기를 바라는 절규가 담겨 있다. 이것은 이 시의 제목이 왜 ‘수라(修羅)’인지를 알려준다. 수라는 불교 용어로, 싸움을 잘하는 귀신 ‘아수라’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난장판을 말할 때 ‘아수라장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아수라’는 싸움이나 그 밖의 다른 일로 큰 혼란에 빠지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가족이 함께 할 수 없는 비극의 현장이 바로 ‘아수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