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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어주는Girl/감성ART여라

희이 선생 뭐가 그리 기쁘시오 … 윤두서 《진단타려도》

윤두서는 고사 속의 인물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하면서도 넓은 길이 한중간에서 꺾여나가도록 하고 그 끝을 아득하게 여백 처리함으로써 이제부터는 오래토록 온 천하가 평화로우리라는 희망을 암시하였다.

 

윤두서 / 진단타려도 / 비단에 채색 / 111.0x68.9cm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 솔 | 2005

 

오주석은 그림을 감상할 때 단순히 ‘보기’보다 그림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는 선인들의 가르침을 깔끔한 어조로 전달한다. 우리 옛 그림을 잘 완상하려면 옛 사람의 눈으로,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끼는 자세를 갖는 것이 기본이라고 일러주며, 그림의 문외한조차 즐겁고도 쉽게 읽어낼 수 있게 해 준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에 수록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9명의 명화 12점에 관한 해설에서 내면의 삼엄함, 도가풍의 은일, 풍아(風雅)의 유유자적 같은 분위기가 스멀스멀 피어난다.

 

물 뿌리고 비질한 마당처럼 그지없이 깨끗한 길, 맑고 투명한 대기 속에 나뭇잎 하나 풀잎 하나까지 정갈해 보이는 아침, 뒤편 숲에는 상서로운 안개마저 서려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복건을 쓴 점잖은 선비가 갑자기 나귀 위에서 미끄러져 그만 고꾸라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자 옆에서 따르던 동자 아이가 기겁을 하여 책봇짐을 내던진 채 주인을 붙들려고 내닫고, 반대편 길을 향해 가던 젊은 나그네는 몸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동자만 혼자 허겁지겁할 뿐 정작 낙상을 코앞에 둔 당사자의 얼굴에는 상황에 걸맞지 않게 함박웃음이 만발해 있고, 또 이네들을 바라보는 나그네의 표정에도 아직 얼굴 가득 흐뭇함이 어려 있다는 점이다.

 

希夷何事忽鞍徒희이하사홀안도, 非醉非眠別有喜비취비면별유희, 夾馬徵祥眞主出협마징상진주출, 從今天下可無悝종금천하가무리

 

희이(陳希夷) 선생 무슨 일로 갑자기 안장에서 떨어졌나
취함도 아니요 졸음도 아니니 따로 기쁨이 있었다네
협마영(夾馬營)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 나왔으니
이제부터 온 천하에 근심 걱정 없으리라

 

을미년 8월 상순에 쓰다

 

위 시를 적은 글씨는 참으로 반듯하고 단아하여 보통 사람의 솜씨가 아닌 듯 싶다. 그 주인이 누군지 궁금하여 말미에 찍은 주문방인을 살펴보니 인문은 ‘신장(宸章)’이다. ‘신장’이라면 사람 이름이 아니라 ‘임금의 글’이라는 뜻이다. …… 당시의 임금은 바로 숙종이요, 그 재위 41년째 되는 때이다.

 

먼저 그림의 주인공인 저 풍채 좋은 도사는 호를 희이선생이라 하는 진단陳摶이다. …… 희이선생은 난세 중에 여러 왕조가 번갈아 일어서고 새 황제가 등극할 적마다 여러 날 찌푸린 얼굴을 짓곤 했다고 한다. 그것은 저들이 천하를 길이 안정시킬 ‘참된 군주’가 아니라, 잠시 힘으로 권좌를 차지한 ‘거짓 군주’에 불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은 흰 나귀를 타고 지금의 하남성 개봉으로 가던 길에 지나가는 행인에게서 조광윤이란 인물이 송나라를 세우고 태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부터 조광윤을 진정한 황제의 재목으로 생각해왔던 선생은 그 얘기를 듣고 박장대소를 하며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그만 안장에서 미끄러졌는데, 그 다급한 와중에서도 “천하는 이제 안정되리라!”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저 희이선생의 얼굴이다. 살집 좋고 혈색 좋은 풍성한 얼굴에 큼직한 코, 그리고 치켜 올라간 두 눈과 눈썹, 좌우로 길게 늘어진 턱수염과 위엄에 찬 구레나룻 ……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다. 바로 윤두서, 바로 그의 《자화상》에 드러난 화가 자신의 얼굴이다.

 

《진단타려도》에서 특히 볼 만한 점은 진단과 흰 나귀의 정교하고 기품 있는 묘사이다. 윤두서는 본래 인물과 말 그림을 특히 잘 그렸다고 전하거니와 여기에 그 진면목이 잘 드러나 있다. 반면에 나무줄기를 꽈배기처럼 비틀리게 그린 것은 『고씨화보』나 『당시화보』 등 화가가 공부했던 중국의 화보 수법이 반영된 것으로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느낌이 없지 않다. 나무둥치 오른편에 숨기듯이 찍혀진 주문장인 도서 ‘공재恭齋’는 바로 윤두서의 호다.

 

윤두서는 고사 속의 인물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하면서도 넓은 길이 한중간에서 꺾여나가도록 하고 그 끝을 아득하게 여백 처리함으로써 이제부터는 오래도록 온 천하가 평화로우리라는 희망을 암시하였다. …… 채색도 주제와 걸맞는 소청록법을 써서 산뜻하기 그지 없다. 소청록이란 수묵담채를 바탕으로 그린 위에 석청과 석록 등 광물성 안료를 부분적으로 엷게 더한 것이니, 화폭은 화사하면서도 고상함이 돋보인다. 바위 주름가에 보이는 태점도 약간 넓은 목점 가운데 다시 작은 석록 색점을 더하여 마치 보석이 반짝이는 듯한 효과를 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나귀에서 떨어져도 그저 기쁠 뿐이었던 희이선생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배려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