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백편의자현/詩로빚어낸마음 15

세상에 쓸모 없는 사람은 없다 … 김영승 「아름다운 폐인」

방안에만 박혀 아무 것도 성취하는 것이 없이 지내는 날이 길어져 갈수록 폐인이 되어가고 있는 나를 느낀다. 돌파구를 찾을 수 없어 모든 걸 포기해 버리고 될 대로 되라며 지내고 있던 나날들. 그때 만났던 시가 바로 김영승의 「아름다운 폐인」이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이 시집은 내 소중한 책 중 하나가 되었다. 내 모습이 결코 아름다워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 자신 있게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라는 말은 힘이 있어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어쩌면 이 때 나는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는 누군가의 확고한 말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언제나 고마운 시, 오늘은 김영승 시인의 「아름다운 폐인」을 읽어본다. 아름다운 폐인 김영승 | 미학사 | 1991 나는 폐인입니다 ..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 고은 「그 꽃」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은 제목 없는 짧은 시들이 죽 열거되어 있는 시집이다. 언뜻 보면 단순한 내용에, 유독 짧은 시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짧은 시라고 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마저 짧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이 시집 속에 시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무심한 듯 던진 그 짧은 시 속에 깊은 철학적 이치를 느낄 수 있다. 오늘은 그 시들 중 「그 꽃」을 읽어본다. 「그 꽃」은 시집의 다른 시와 마찬가지로 제목 없이 실려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시구의 "그 꽃"을 제목으로 하여 별도의 시처럼 부르고 있기에 여기서도 이 시를 「그 꽃」으로 부르기로 한다. 순간의 꽃 고은 | 문학동네 | 2001 이 짧은 시의 내용은 간단하다. 산에 오를 때는 보지 못했던 꽃을 내려갈 때는 보게 됐다는 것이 내용..

생활 속에서 잃어버린 삶은 어디에 있는가? … T.S. 엘리엇 『바위』

The Eagle soars in the summit of Heaven, The Hunter with his dogs pursues his circuit. О perpetual revolution of configured stars, О perpetual recurrence of determined seasons, О world of spring and autumn, birth and dying! The endless cycle of idea and action, Endless invention, endless experiment, Brings knowledge of motion, but not of stillness; Knowledge of speech, but not of silence; Knowle..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 … 김선우「깨끗한 식사」

예전에 고기집을 함께 다니던 친구들 몇 명이 TV에서 도살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내 주위에도 채식주의자가 여럿 있는 것을 보면 채식주의가 더 이상 독특한 문화인 것 같진 않다. 잔인하게 생명을 죽이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게 되지만, 채소라고 해서 뭐가 그리 다른 것일까? 김선우 시인의 「깨끗한 식사」를 음미한 이라면 채소 또한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생명을 빼앗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오늘 「깨끗한 식사」를 읽으며 음식을 대할 때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나를 돌아본다. 내 몸..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 … 이성복「음악」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하듯 음악을 통해 내 삶을 생각해보게 되는 날이 있다. 특히 운전을 하면서 라디오에서 들리는 음악을 들을 때면 내 삶이 조명되어 보이는 날이 많은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이 세상에서 적어도 차 안에 있을 때는 그곳이 혼자만의 공간이 되니까. 비가 온다면 그 공간은 더 은밀하고, 시간마저도 힘을 잃은 공간이 된다. 비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듣다가 문득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이 내 인생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낀 화자가 있다. 지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꼭 내 이야기 같다는 생각, 혹은 내가 꿈꾸었던 삶이 음악에 그대로 적혀 있다는 느낌. 굳이 음악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으면서, 영화를 보면서..

그런데 누가 죽었다고? … 김승희「한국식 죽음」

오늘 이웃의 장례식이 두 군데가 있었다. 평소 왕래가 빈번했던 분들이라 그 분들의 생전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다. 늘 인자하게 웃으시던 할머니의 가시는 길 평안하시라며 찾은 빈소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먹기에 번다한 모습이다. 어색하게 굳은 영정 사진 앞에 국화를 놓고, 상주와 인사를 하고, 이내 자리를 떴다. 잠시 할머니의 모습을 상기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 장례식이었다. 비단 이 장례식만의 모습은 아니다. 비슷한 모습의 영정사진과 비슷한 옷을 입은 상주들… 장례식장을 찾을 때마다 다른 점은 별로 없다. 누가 돌아가셨든 같은 모습, 같은 절차에 따라 장례는 진행된다. 이런 장례식장의 모습을 보면서 가끔 생각해 본다. 장례식장에 오는 저들 중 과연 망자를 기억하고, 망자를 위해 오는 이는 얼마나 될까..

생명과 생명이 만나 소통하다 … 백석「수라」

거미가 내 창문 앞에 거미줄을 치고 있다. 언제 쳤는지 꽤 단단한 거미줄을 만들었다. 거미줄을 걷어 버릴까 하다 백석의 「수라(修羅)」가 생각이 나 시커먼 거미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냥 그렇게 계속 놔둘 수는 없으나 정성스레 친 거미줄을 한순간에 파괴해버리는 것이 내키지가 않았다. 하기야 「수라」를 읽고 나서 거미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평소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거미’를 친숙한 존재로 만들어 주고 있는 백석의 「수라」를 읽어 본다. 정본 백석 시집 백석 | 고형진 역 문학동네 | 2007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날인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벌인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

아직도 저를 간통녀로 알고 계시나요 … 문정희「처용 아내의 노래」

고전은 분명 우리 것이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낯선 사람과 만나고, 낯선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하는 행위들을 보는 것은 고전을 읽는 매력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낯섦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것이 ‘고전의 새로운 독법’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제멋대로 해석한 작품들과의 만남은 늘 반갑다.그 속에 있는 ‘일탈성’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현재의 고민이나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일탈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심하게 어긋나버린 패러디 작품들을 보면 불쾌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문정희 시인의 「처용 아내의 노래」를 처음 봤을 때 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처용설화」는 노래와 춤, 연극, 영화 등에서 다양하게 각색되어 온 작품이..

'밥' 한 그릇 뚝딱! 어떠신가 … 함민복「긍정적인 밥」

아버지께선 요즘 대선 후보자들이 내놓은 책들을 읽고 계시는데, 그 중 김두관이 쓴 책에서 문병란의 「희망가」를 보시곤 한번 읽어보라 권해주셨다. 누구의 시인지는 몰랐지만 「희망가」는 이미 내게 익숙한 시였다. 많은 곳에서 인용되고 있는 구절들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익숙한 시여서 일까,「희망가」를 읽으며 시에 집중이 되기보다 오히려 다른 시가 떠올랐다. 내가 힘들 때 생각나는 시 중 하나인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인데, 「희망가」와 비슷한 맥락의 시이지만, 내겐 좀 더 마음을 적셔주는 시다. 행복은 어떤 감정이나 상황이 아닌 ‘선택’인 것이라 한다. 나의 선택에 따라 삶은 행복도, 불행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 시를 써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밝고 긍정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 유하「사랑의 지옥」

하늘공원에 호박꽃이 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시가 어렴풋이 생각났다. 그래서 찾아보려 했는데, 시인과 시제가 생각이 나지 않아 며칠을 찾아 헤맸다. 결국 찾지 못해 인터넷 지식인의 힘을 빌렸고, 겨우 찾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쁘던지… 진작 물어볼 걸 후회가 됐다. 대개 사랑이라고 하면 행복하고 달콤한 이미지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과연 사랑이 달콤하기만 한 것일까? 적어도 시인에게는 사랑은 지옥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사랑에 빠진 자신의 처지를 호박꽃 속에 갇힌 꿀벌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 유하의 「사랑의 지옥」을 음미해 본다. 세상의 모든 저녁 유하 | 민음사 | 1999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