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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全문보기/삼국유사

처용이 역신을 물리친 그 시작은

《처용설화》와 향가인 《처용가》는 일연이 쓴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에 있는 「처용랑과 망해사(處容郎 望海寺)」조에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 제 49대 헌강왕(897년)이 울산의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황성동 세죽마을 일대)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잠시 바닷가에서 쉬고 있었다. 그때 검은 구름과 안개가 앞을 막아 왕이 이상하게 여겨서 좌우 신하들에게 연유를 물었다. 일관이 “이는 동해용이 한 변괴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합니다.”고 아뢴다. 이에 이 근처에 절을 짓도록 명하니, 동해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의 덕을 찬양하는 뜻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었다.

동해용의 아들 중 하나가 왕을 따라 서라벌로 갔는데, 그 이름이 처용이었다. 처용은 미녀와 결혼을 하고 급간의 벼슬을 얻어 왕의 정사를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처용이 밖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역신과 아내가 동침을 하고 있었다. 이때 처용은 춤을 추며 일명 ‘처용가’를 불렀다.

그러자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 무릎을 꿇고 엎드려 “맹세코 오늘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하며 잘못을 빌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그려 대문에 붙였고, 나쁜 귀신과 질병이 사라졌다. 왕이 동해용을 만났을 때 명한 대로 절을 지었는데 그 이름이 망해사(望海寺)다.

『삼국유사』의「처용랑과 망해사」조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처용가》의 해석은 따로 한다.

 

第四十九제사십구憲康大王헌강대왕之代지대 自京師至於海內자경사지어해내 比屋連墻無一草屋비옥련장무일초옥 笙歌不絶道路생가부절도로 風雨調於四時풍우조어사시

제49대 헌강대왕 시대에는 서울[京師]로부터 동해안[海內]에 이르기까지 가옥이 나란히 하여 담장이 줄을 이었지만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 도로에서는 생황[笙] 연주소리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於是어시 大王遊대왕유開雲浦개운포(鶴城학성西南今서남금蔚州울주) 王將還駕왕장환가 晝歇於汀邊주헐어정변 忽雲霧冥曀홀운무명에 迷失道路미실도로. 恠問左右괴문좌우 日官奏云일관주운: 「此東海龍所變也차동해용소변야 宜行勝事以解之의행승사이해지.」 於是어시 勅有司칙유사 爲龍刱佛寺近境위용창불사근경 施令已出시령이출 雲開霧散운개무산. 因名인명開雲浦개운포

이때 대왕이 개운포(학성의 서남쪽에 있으며 지금의 울주)에 놀러 갔다. 왕이 어가(御駕)로 돌아가려하는데, 낮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어둡고[冥] 음산하게[曀] 끼어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다. (왕이) 괴이[恠]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연유를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이는 동해용(東海龍)이 하는 변(變 : 災異 徵兆)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勝事]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
이에 (왕이) 유사(有司,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방에 절을 새로 짓도록[刱] 하였다. 이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구름이 걷히고 안개도 흩어졌다. 이로 인해 그 지역을 개운포(開雲浦, 구름이 걷힌 포구)라 부르게 된 것이다.

東海龍喜동해용희 乃率七子現於駕前내솔칠자현어가전 讚德獻舞奏樂찬덕헌무주악. 其一子隨駕入京기일자수가입경 輔佐王政보좌왕정 名曰명왈處容처용. 王以美女妻之왕이미녀처지 欲留其意욕유기의 又賜級干職우사급간직

동해용이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어가(御駕) 앞에 나타나 (왕의) 덕행을 찬양하고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했다. 동해용의 아들 하나가 어가(御駕)를 따라 서울[京]로 들어가서 왕정(王政)을 보좌하였는데,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이 미녀로 그의 처를 삼게 하여 그 마음을 잡고자 했으며, 또 급간(級干)의 관직까지 주었다.

其妻甚美기처심미 疫神欽慕之變역신흠모지변 無人夜至其家竊與之宿무인야지기가절여지숙

처용의 처가 매우 아름다웠기[甚美] 때문에 역신(疫神)이 (그녀를) 흠모하는 변(變)이 발생하였다. 사람이 없는 밤(즉 처용이 출타하여 집을 비운 밤)이면 그 집에 이르러[至] (좀도둑처럼) 몰래 숨어들어[竊] 그녀와 더불어[與] 밤새도록 동숙[宿]했다.

處容自外至其家처용자외지기가 見寢有二人견침유이인 乃唱歌作舞而退내창가작무이퇴

처용이 밖[外]에서 그 집에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이인(二人)이 있었다. 이에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다가 물러나왔다.

歌曰가왈:

노래는 이러하다.

東京明期月良동경명기월량 夜入伊遊行如可야입이유행여가 入良沙寢矣見昆입량사침의견곤 脚烏伊四是良羅각오이사시량라 二肹隱吾下於叱古이힐은오하어질고 二肹隱誰攴下焉古이힐은수복하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隱본의오하시여마어은 奪叱良乙何如爲理古탈질량을하여위리고

神現形신현형 跪於前曰궤어전왈: 「吾羨公之妻오선공지처 今犯之矣금범지의 公不見怒공불견노 感而美之감이미지. 誓今已後서금이후 見畫公之形容견화공지형용 不入其門矣불입기문의.」 因此인차 國人門帖국인문첩處容처용之形지형 以僻邪進慶이벽사진경

이때에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어 (처용의) 앞에 무릎을 꿇고[跪, 위급한 상황을 당하여 무릎을 꿇음] 말하였다.
“내가 公의 처를 탐내어[羨] 보다시피[今] 범하였으나, 공은 노여움을 보이지 않으니[不見怒] 감동하였고 아름답게 여깁니다. 맹세코 이 후로는 공의 형용(形容)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해서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형상을 대문 주련에 붙여 벽사진경(僻邪進慶, 사악한 귀신은 쫓고 좋은 일은 맞아들임)으로 했다.

王旣還왕기환 乃卜내복靈鷲山영취산東麓勝地置寺동록승지치사 望海寺망해사 亦名역명新房寺신방사 乃爲龍而置也내위용이치야

왕이 즉시 돌아와 곧 영취산 동쪽 기슭의 좋은 자리[勝地]를 잡아[卜]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라 했고, 또는 신방사(新房寺)라 불렀다. 이는 용을 위해 세운 것이다.

又幸우행鮑石亭포석정 南山남산神現舞於御前신현무어어전 左右不見좌우불견 王獨見之왕독견지. 有人現舞於前유인현무어전 王自作舞왕자작무 以像示之이상시지. 神之名或曰신지명혹왈祥審상심 故至今國人傳此舞고지금국인전차무 御舞祥審어무상심 或曰혹왈御舞山神어무산신. 或云혹운 旣神出舞기신출무 審象其貌심상기모 命工摹刻명공모각 以示後代이시후대 故云고운象審상심. 或云혹운霜髥舞상염무 此乃以其形稱之차내이기형칭지又幸於우행어金剛嶺금강령 北岳북악神呈舞신정무 玉刀鈐옥도령同禮殿동례전宴時연시 地神出舞지신출무 地伯지백級干급간。《語法集어법집: 「于時우시 山神獻舞唱歌云산신헌무창가운 智理多都波지리다도파. 都波等者도파등자 蓋言以智理國者개언이지리국자 知而多逃지이다도 都邑將破云謂也도읍장파운위야。」

(왕이) 포석정(鮑石亭)으로 행차하니, 남산(南山)의 신(神)이 나타나 어전에서 춤을 추었는데, 신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보였다. 앞에서 실제로 춤을 추는 사람이 있으니 왕이 몸소 그 보이는 형상으로 춤을 추었다. 신의 이름은 혹 상심(祥審)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한다. 어떤 이는 원래 신이 나와 춘 춤을 그 모양의 상(象)을 살펴서 공장(工匠)에게 본떠 새기도록 명령하여 후대에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이라 했다고 한다. 혹은 상염무(霜髥舞, 서리와 같은 흰 털 춤)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형상을 본떠 일컫는 말이다. 또 금강령(金剛嶺)에 행차했을 때, 북악의 신이 춤을 추니 옥도령(玉刀鈐)이라 불렀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연회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니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 불렀다.
『어법집(語法集)』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때 산신이 춤을 추고 노래 부르며 이르길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 하였다. 도파 등이란 아마도 지혜[智]로써 나라를 다스리는[理] 자가 알고 많이[多] 도망하니 도읍[都]이 곧 파괴된다[波]는 것을 일러 말함일 것이다.”

乃地神山神知國將亡내지신산신지국장망 故作舞以警之고작무이경지 國人不悟국인불오 謂爲現瑞위위현서 耽樂滋甚탐락자심 故國終亡고국종망

이렇게 지신(地神)과 산신(山神)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기에 춤을 지어서 그를 경계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이를 상서로운 현상으로 여겨 탐락(耽樂 : 주색에 빠져 흥청망청 즐김)함이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

 

處容郎 望海寺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 大王遊開雲浦(在鶴城西南今蔚州), 王將還駕, 晝歇於汀邊, 忽雲霧冥曀, 迷失道路. 恠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 勅有司, 爲龍刱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現於駕前, 讚德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其妻甚美, 疫神欽慕之變, 無人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攴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 神現形, 跪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見畫公之形容, 不入其門矣.」 因此, 國人門帖處容之形, 以僻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海寺, 亦名新房寺, 乃爲龍而置也. 又幸鮑石亭, 南山神現舞於御前, 左右不見, 王獨見之. 有人現舞於前, 王自作舞, 以像示之. 神之名或曰祥審, 故至今國人傳此舞, 曰御舞祥審, 或曰御舞山神. 或云, 旣神出舞 審象其貌, 命工摹刻, 以示後代, 故云象審. 或云霜髥舞, 此乃以其形稱之. 又幸於<金剛嶺>時, 北岳神呈舞, 名玉刀鈐. 又同禮殿宴時, 地神出舞, 名地伯級干.《語法集》云: 「于時, 山神獻舞, 唱歌云, 智理多都波都波等者, 盖言以智理國者, 知而多逃, 都邑將破云謂也.」 乃地神 山神知國將亡, 故作舞以警之, 國人不悟, 謂爲現瑞, 耽樂滋甚, 故國終亡.

- 일연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2 처용랑 망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