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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全문보기/삼국유사

양지스님의 기묘한 행적과 영묘사 장육삼존 주조

양지(良志)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 632∼647) 때의 승려, 서예가, 조각가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설적 인물이다. 그는 기적을 많이 행하였는데 석장(錫杖)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서 시주(施主)할 집에 찾아가 흔들면서 소리를 내었고, 그 집에서는 이를 알고 재(齋)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었으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또 “온갖 기예에 통달하여 그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전탑(塼塔)과 기와를 만들고, 벽돌에 3천불을 새겨 절 안에 봉안하였는데,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조소(彫塑)였다”고 쓰고 있다. 그의 작품은 흥륭사(興隆寺)⋅법림사(法林寺)의 사액(寺額)과 사천왕사(四天王寺)의 신장상(神將像)이 전해지고 있는데도 전설적인 인물로만 다루어졌다. 그러나 1986년 동국대학 박물관팀은 그가 창건했다는 석장사터를 발굴하여, 그가 돌에 새겨넣은 연기법송(緣起法頌)의 글씨와 불탑 ·불상이 새겨진 전탑 벽돌 190여 점을 출토하였다.

삼국유사』 의해(義解) 제5 「양지사석(良志使錫)」조에 양지와 관련한 설화와 작자 미상의 4구체 향가인 《풍요》가 실려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 《풍요》의 해석은 따로 한다.

良志使錫양지사석

양지가 지팡이를 부리다

釋良志석양지 未詳祖考鄕邑미상조고향읍 唯現迹於善德王朝유현적어선덕왕조錫杖頭掛一布袋석장두괘일포대 錫自飛至檀越家석자비지단월가 振拂而鳴진불이명 戶知之納齋費호지지납재비 帒滿則飛還대만즉비환故名其所住曰고명기소주왈錫杖寺석장사其神異莫測皆類此기신이막측개류차

승려 양지(良志)는 그 조상을 자세히 알 수 없고 고향은 밝힐 수 없다. 단지 선덕왕(善德王) 때에 행적을 나타냈을 뿐이다. (스님이) 지팡이[錫杖] 머리에 포대 하나를 걸어두면 지팡이가 저절로 (시주하는) 집을 넘어가 단(檀)까지 날아가, 부르르 떨며 진동하여 소리를 내면[振拂而鳴] 그 집에서 (양지 스님의 석장이 온 것을) 알고 재(齋) 올릴 비용을 포대에 넣었다. 그렇게 포대가 가득 차면 날아서 (저절로) 되돌아왔다. 이 때문에 양지 스님이 머물고 있는 절을 석장사(錫杖寺)라 불렀다. 그는 신기하고 괴이하여 다른 사람이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선덕왕(善德王) : 『삼국유사』「善德王知幾三事(선덕여왕이 세 가지 일을 미리 알았다)」조에 보면 선덕여왕(善德女王)이란 덕만왕(德曼王)의 시호인데 ‘덕만의 曼(만)을 萬(만)으로도 쓴다.’고 하였다. 덕만(德萬)을 직역하면 ‘공덕을 많이 쌓은 왕’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조에 보면 선덕여왕은 예지력이 뛰어났는데, 그 사례들은 선혜(善慧)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월인석보(月印釋譜)』의 기록을 보면 행자(行者) 시절의 선혜 보살이 공덕을 많이 쌓아 석가여래(如來)로 환생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선덕왕의 선혜는 자신이 쌓은 공덕이 여래로 환생하기 위한 노력, 즉 석가여래의 전생이었던 선혜 보살의 전철을 밟는 공덕과 연관된다.
선덕여왕은 ‘내가 죽으면 도리천(忉利天) 중앙에 묻으라.’고 하였는데, 도리천 내의 선법당(善法堂)에 거주하면서 선악을 주재하는 보살의 이름이 바로 선덕이다. 또한 도리천의 중앙에는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이 머무르는 천궁, 즉 선경성(善見城)이 있다. 도리천 중앙에 장사지내라고 한 선덕왕의 말에서 그녀의 사후 소망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석장(錫杖) : 비구(比丘)가 늘 가지고 있어야 하는 ‘비구 18物’의 하나이다. 비구가 여행을 할 때 반드시 석장을 휴대해야 하므로 승려가 널리 다니면서 포교하는 것을 비석(飛錫), 다른 절에 가서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괘석(掛錫)이라 한다.
비석(飛錫), 괘석(掛錫)이라는 표현이 석장두괘(錫杖頭), 석자비(錫自), 비환(還) 등 문구에 녹아 있다.
비구승이 걸식을 할 때에는 석장을 흔들어 소리를 내서 시주를 받으러 온 것을 알리기도 하고, 숲을 지날 때에는 이것으로 독사 등 해충을 막고, 늙어서는 몸을 의지하는 지팡이로도 사용한다. 밀교(密敎)에서는 석장을 의인화하여 보살이라 부르기도 한다

진불이명(振拂而鳴) : 석장을 흔들어 소리를 내서 시주승이 왔음을 알리는 행위

旁通雜譽방통잡예神妙絶比신묘절비. 又善筆札우선필찰. 靈廟丈六三尊영묘장육삼존天王像천왕상幷殿塔之瓦병전탑지와 天王寺塔下八部神將천왕사탑하팔부신장 法林寺主佛三尊左右金剛神법림사주불삼존좌우금강신 皆所塑也개소소야. 書靈廟서영묘 法林二寺額법림이사액. 又嘗彫磚造一小塔우상조전조일소탑 幷造三千佛병조삼천불 安其塔置於寺中안기탑치어사중致敬焉치경언

(그밖에 양지 스님은) 잡다한 기예(技藝)에도 두루 능통하고 솜씨가 뛰어나 그 신묘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또한 필찰(筆札)에도 뛰어났다. 영묘사의 장육삼존(丈六三尊)과 천왕상(天王像) 및 전각과 탑[殿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 탑 아래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진흙을 사용하여) 소성(塑成)한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 두 절의 (양지 스님이) 현판을 썼다.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하나의 작은 탑[小塔]을 만들고, 삼천불(三千佛)과 함께 만들어 그 탑을 안치하여 절 가운데 두고 극진히 공경했다.

영묘(靈廟) : 영묘사가 창건된 터는 본시 돌아가신 신라왕들의 영혼을 모셨던 영묘(靈廟)가 자리 잡고 있던 신령스러운 장소다. 신라의 영묘란 조선조 선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지냈던 종묘(宗廟)와 대등한 의미의 장소이다. 그러한 터에 사찰을 세운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영묘의 역할을 겸한 왕실 사찰을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사찰 이름은 영묘를 계승하여 당연히 ‘영묘사’가 되는 것이며 창건 과정에서부터 왕실의 특별한 지원과 우대를 받게 된다.
둘째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변화의 물결이다. 즉, 왕실 사찰인 ‘영묘사’ 창건을 계기로 토속적이고 자생적인 선도(仙道)를 대신하는 외래종교, 즉 불교의 부흥을 예상할 수 있다.
『삼국유사』「효공왕」조에는 “53대 신덕왕 4년(915)에 ‘영묘사’ 내의 행랑채에 까치집이 34개 까마귀집이 40개가 지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부터 20년 후, 56대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바치니 신라가 망하고 말았다. 이로써 효공왕 조의 기록이 신라의 종묘사직이 위태로움을 ‘영묘사’에 빗대어 예언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또한 ‘영묘사’가 신라왕들의 영혼을 모셨던 왕실사찰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역사적 근거임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영묘사’는 조선 초기까지 있었으나 그 이후 폐허가 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양지사석(良志使錫)」조문의 실제적인 핵심은 영묘를 ‘영묘사’로 변화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불사(佛事)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장육(丈六) : 불상은 크기에 따라 장육상(丈六像) 반장육상(半丈六像) 등신상(等身像), 한 뼘 크기의 걸수반불상(傑手半佛像) 등으로 나눈다. 장육상의 ‘丈六’은 석가여래의 키가 ‘一丈六尺’이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말이다. 따라서 장육상이라 하면 16척, 480cm 높이의 불상을 뜻한다.

삼존(三尊) : 삼존에는 석가삼존, 미타삼존, 약사삼존의 세 종류가 있다. 석가삼존은 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세 부처를 함께 높여서 일컫는 말이다. 미타삼존은 중존인 미타불과 좌우의 협시(脇侍)인 관음보살, 세지보살을 높여서 일컫는 말이다. 약사삼존은 가운데의 약사유리광불, 좌협시인 일광편조보살, 우협시인 월광편조보살을 함께 높여서 일컫는 말이다. 특별한 언급이 없이 삼존이라 할 때는 석가삼존을 의미한다고 본다.
중존인 미타불은 미타여래, 석가모니불은 석가여래, 약사유리광불은 약사여래로도 불린다. 세 중존의 공통점이 바로 여래이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영묘사를 창건할 때 가장 먼저 만든 장육상(丈六像)이 여래불이요, 영묘사의 주불(主佛)도 여래불일 것이다.

其塑靈廟之丈六也기소영묘지장육야 自入定자입정以正受이정수 所對爲揉式소대위유식 故傾城士女爭運泥土고경성사녀쟁운니토

그가 영묘사의 장육(丈六)을 빚어 만들 때 정수(正受)에서 스스로 입정(入定)하여 유식(揉式)으로 만든다고 하였으므로, 온 성안의 남녀[士女]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라 쌓았다.

입정(入定) : 잡념을 버리고자 수행에 드는 것

정수(正受) : 잡념에서 벗어나 법심(法心)을 받은 선정(禪定)의 경지

유식(揉式) : 진흙을 부드럽게 하여 토우(土偶)를 만드는 방식이니, 손으로 주무르고, 붙이고, 문지르고, 비비는 모든 방법이 다 포함될 것이다. 이렇게 진흙으로 만든 상을 소상(塑像)이라 한다.

風謠云풍요운

(당시에 불렀다는)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來如來如來如내여내여내여
來如哀反多羅내여애반다라
哀反多矣徒良애반다의도량
功德修叱如良來如공덕수질여량래여

至今土人舂相役作皆用之지금토인용상역작개용지 蓋始于此개시우차

지금까지도 그곳 사람[土人]들이 절구질을 하거나[舂] 품앗이 등의 작업을 할 때[相役]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마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成之費성지비 入穀二萬三千七百碩입곡이만삼천칠백석 (或云혹운金時租금시조). 議曰의왈 師可謂才全德充사가위재전덕충 而以大方이이대방 隱於末技者也은어말기자야

불상을 처음에 만드는 비용으로 곡식 23,700석이 들었다(어떤 사람은 이 비용이 금칠을 다시 할 때의 비용이라고 한다).
논평해서 말한다.
“법사는 재주가 완벽하고 덕을 갖추고 있으며 큰 인물[大方]로써 하찮은 기술에 숨어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讚曰찬왈

다음과 같이 기린다.

齋罷堂前錫杖閑재파당전석장한
靜裝爐鴨自焚檀정장노압자분단
殘經讀了無餘事잔경독료무여사
聊塑圓容合掌看료소원용합장간

재를 마치니 북당 앞에 지팡이 한가롭고
고요한 몸가짐으로 향불 살피며 스스로 단향을 피우네
못다 읽은 불경을 읽고 나면 할 일이 없어져
부처님 모습을 빚어 놓고 합장하여 뵌다네

良志使錫

釋良志, 未詳祖考鄕邑, 唯現迹於善德王朝。 錫杖頭掛一布帒, 錫自飛至檀越家, 振拂而鳴, 戶知之納齋費, 帒滿則飛還。 故名其所住曰錫杖寺, 其神異莫測皆類此。 旁通雜譽, 神妙絶比, 又善筆札。 靈廟丈六三尊 天王像幷殿塔之瓦, 天王寺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 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書靈廟 法林二寺額。 又嘗彫磚造一小塔, 竝造三千佛, 安其塔置於寺中, 致敬焉。 其塑靈廟之丈六也, 自入定以正受所對爲揉式, 故傾城士女爭運泥土。 風謠云: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至今, 土人舂相役作皆用之, 蓋始于此。 像初成之費, 入穀二萬三千七百碩(或云改金時租)。 議曰: 師可謂才全德充, 而以大方隱於末技者也。 讚曰:

齋罷堂前錫杖閑, 靜裝爐鴨自焚檀, 殘經讀了無餘事, 聊塑圓容合掌看。

- 일연 『삼국유사』 의해(義解) 제5 양지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