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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백편의자현/詩로빚어낸마음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 … 김선우「깨끗한 식사」

예전에 고기집을 함께 다니던 친구들 몇 명이 TV에서 도살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내 주위에도 채식주의자가 여럿 있는 것을 보면 채식주의가 더 이상 독특한 문화인 것 같진 않다. 잔인하게 생명을 죽이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나도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게 되지만, 채소라고 해서 뭐가 그리 다른 것일까?

 

김선우 시인의 「깨끗한 식사」를 음미한 이라면 채소 또한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생명을 빼앗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오늘 「깨끗한 식사」를 읽으며 음식을 대할 때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나를 돌아본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문학과지성사 | 2007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 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 년 전이나 만 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식을 할 때나 육식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 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 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동을 끊어 내는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상품과 화폐만 있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언가 공급하기 위해 나 아닌 것의 숨을 끊을 때 머리 가죽부터 한 터럭 뿌리까지 남김없이 고맙게, 두렵게 잡숫는 법을 잃었으니 이제 참으로 두려운 것은 내 올라앉은 육중한 접시가 언제쯤 깨끗하게 비워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도대체 이 무거운, 토막 난 몸을 끌고 어디까지!

 

 

 


시인은 어느 날 접시 위의 풀들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고요한 사냥감”들이 한때는 목숨을 가지고 있었던 생명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것을 깨닫고 난 후 아무 느낌 없이 그것을 씹어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식탁에 올라온 음식을 보며, 그것이 목숨이 붙어있었던 생명체였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육식이든 채식이든 말이다.

 

직접 사냥을 하고, 채집을 해야 했던 시대에는 생명을 직접 끊어야 음식을 마련할 수 있었기에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있었다. 몇 년 전 아마존에 사는 과라니족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지금까지 사냥과 채집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부족이었다. 그들과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사냥을 하며, 열매를 따며, 음식을 하며 계속해서 외던 주문과 같은 노래였다. 자신들이 살아가기 위해 취할 수 밖에 없는 모든 자연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노래. 열매 하나를 따면서도 진지하게 노래 부르던 그들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잊히지가 않는다. 자연 앞에 마치 내가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으며 작은 과일 하나에도 감사했었는데, 그 마음은 아마존을 빠져나오면서 까맣게 잊어버렸다. 음식이 된 동식물이 애초부터 생명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그저 단순한 상품으로 간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장과 화폐를 이용해 음식을 마련할 수 있는 우리 사회는 이런 망각을 더욱더 심화시킨다. 생명의 목숨을 직접 끊는 일 없이, 시장에서 음식 재료를 돈과 바꾸어 살 수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었는지’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품었던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을 잃어버린 채 그냥 맛있는 것을 찾아 먹으면 그만인 세상.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은 어쩔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생명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마저 잃어버린 세상은 분명 문제다.

 

시인은 우리도 언젠가는 접시 위의 풀들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한다. 그 생명들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처럼 우리들 역시 언젠가는 죽어서 그 생명들을 위한 음식이 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우리가 “머리 가죽부터 한 터럭 뿌리까지 남김없이 고맙게, 두렵게 잡숫는 법”도 잃어버리고 생명을 생명답게 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다른 생명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 “내 올라앉은 육중한 접시가 언제쯤 깨끗하게 비워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곳곳에서 “도대체 이 무거운, 토막 난 몸을 끌고 어디까지!”라는 한탄이 들리지 않은가.

 

우리가 지금 가져야 할 것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가가 아니라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일지도 모른다.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느끼는 마음, 생명을 생명답게 대할 수 있는 마음을 잃지 않음으로 깨끗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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