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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백편의자현/詩로빚어낸마음

세상에 쓸모 없는 사람은 없다 … 김영승 「아름다운 폐인」

방안에만 박혀 아무 것도 성취하는 것이 없이 지내는 날이 길어져 갈수록 폐인이 되어가고 있는 나를 느낀다. 돌파구를 찾을 수 없어 모든 걸 포기해 버리고 될 대로 되라며 지내고 있던 나날들. 그때 만났던 시가 바로 김영승의 「아름다운 폐인」이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이 시집은 내 소중한 책 중 하나가 되었다. 내 모습이 결코 아름다워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 자신 있게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라는 말은 힘이 있어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어쩌면 이 때 나는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는 누군가의 확고한 말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겐 언제나 고마운 시, 오늘은 김영승 시인의 「아름다운 폐인」을 읽어본다.

 

아름다운 폐인

김영승 | 미학사 | 1991

 

 

 

나는 폐인입니다
세상이 아직 좋아서
나 같은 놈을 살게 내버려 둡니다
착하디 착한 나는
오히려 너무나 뛰어나기에 못 미치는 나를
그 놀랍도록 아름다운 나를
그리하여 온통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나를
살아가게 합니다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자신있게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그러기에 슬픈 사람일 뿐이지만
그렇지만 나는 갖다 버려도
주워 갈 사람 없는 폐인입니다

 

 

 


'폐인'은 사전적 의미로 ‘병 따위로 몸을 망친 사람, 혹은 쓸모없이 된 사람’을 일컫는다. ‘폐인’이라는 말 자체에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데, 이 시 속에서는 “착하디착한”이나 “뛰어나기에 못 미치는”, “놀랍도록 아름다운”과 같은 말과 어울리며 긍정적인 이미지로 쓰이고 있다.

 

2003년 MBC에서 했던 《다모》를 기억하는가. 이 드라마의 인기로 인터넷 《다모》 게시판에 상주하는 집단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그들을 “다모 폐인”이라 하였다. 이때부터 “○○폐인”은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으며, 드라마뿐 아니라 컴퓨터, 인터넷과 관련된 커뮤니티, 온라인 게임 등에 그 제목을 딴 “○○폐인”이 수없이 양산된다. 부정적 의미의 “폐인”은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폐인’이라고 하면서 자랑하듯이 말하고, ‘폐인’으로 불리는 것을 즐기는 등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시가 지어졌을 당시는 이런 “○○폐인”의 문화는 없었지만, 이 시의 화자가 말하는 “폐인”의 모습은 “○○폐인”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폐인’들은 자신의 일에 심취하여 즐거움을 얻는다. 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못하다(부정적인 측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귀한 시간 허투로 보내고 별반 가치 없는 일에 매달린다며, ‘폐인’들의 생활 패턴에 따가운 눈총을 보내며 편견을 가지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 즉 ‘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폐인” 문화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드라마 “○○폐인”을 생각해보면 그들은 한국드라마의 질을 높이고 홍보하는데 한 몫을 하며, 한류열풍을 일으키는데도 일정부분 기여했으며, 디지털 정보에 민감한 “폐인”들 덕분에 IT 기술 발전이 촉진되고, 더하여 인터넷문화를 성숙시키는데도 공헌했다. 이 시의 화자는 말한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맡은 바에 몰두하여 묵묵히 일하는 아름다운 존재라고. 다만 사람들이 그 사람의 쓸모를 몰라줄 뿐.

 

그리고 화자는 “온통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자신 같은 사람을 살게 내버려 두는 사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온통 이 세상의 것이 아”닐지라도 그 사람들을 포용하며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함께 누릴 수 있는 사회, 그래서 어떤 사람도 소외되지 않고 그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회가 진짜 좋은 사회가 아니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들 한다. 그런데 자신의 색이 묻힌 채 빛나지 못한다면, 그 누군가에게 이 세상은 암흑처럼 캄캄하기만 할 것이다. 화자의 말처럼 “세상이 아직 좋으니” 셀 수 없이 많은 색깔이 각자의 빛으로 아름답고 다채롭게 빛나는 좋은 세상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