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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백편의자현/詩로빚어낸마음

아직도 저를 간통녀로 알고 계시나요 … 문정희「처용 아내의 노래」

고전은 분명 우리 것이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낯선 사람과 만나고, 낯선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하는 행위들을 보는 것은 고전을 읽는 매력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낯섦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것이 ‘고전의 새로운 독법’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제멋대로 해석한 작품들과의 만남은 늘 반갑다.그 속에 있는 ‘일탈성’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현재의 고민이나 문제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일탈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심하게 어긋나버린 패러디 작품들을 보면 불쾌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문정희 시인의 「처용 아내의 노래」를 처음 봤을 때 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처용설화」는 노래와 춤, 연극, 영화 등에서 다양하게 각색되어 온 작품이지만, 이 시만큼 낯설고 묘한 재미까지 있는 작품은 없었다. 역신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남자와 바람을 펴 간통한 여자로 낙인이 찍힌 ‘처용의 아내’의 목소리를 들어본다.

 

남자를 위하여

문정희 | 민음사 | 1996

 

 

 

아직도 저를 간통녀로 알고 계시나요.
허긴 천년동안 이 땅은 남자들 세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서라벌엔 참 눈물겨운 게 많아요.
석불 앞에 여인들이 기도 올리면
한겨울에 꽃비가 오기도 하고
쇠로 만든 종소리 속에
어린 딸의 울음이 살아 있기도 하답니다.
우리는 워낙 금슬 좋기로 소문난 부부
하지만 저는 원래 약골인 데다 몸엔 늘 이슬이 비쳐
부부 사이를 만 리나 떼어 놓았지요.
아시다시피 제 남편 처용랑은 기운찬 사내,
제가 안고 있는 병을 샛서방처럼이나 미워했다오.
그날 밤도 자리 펴고 막 누우려다
아직도 몸을 하는 저를 보고 사립 밖으로 뛰어나가
한바탕 춤을 추더라구요.
그이가 달빛 속에 춤을 추고 있을 때
마침 저는 설핏 잠이 들었는데
아마도 제가 끌어안은 개짐이
털 난 역신처럼 보였던가 봐요.
그래서 한바탕 또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처용가랍니다.
사람들은 역신과 자고 있는 아내를 보고도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처용의
여유와 담대와 관용을 기리며
그날부터 부엌이건 우물이건 질병이 도는 곳에
처용가를 써 붙이고 야단이지만
사실 그날 밤 제가 안고 뒹군 것은
한 달에 한 번 여자를 찾아오는
삼신할머니의 빨간 몸 손님이었던 건
누구보다 제 남편 처용랑이 잘 알아요.
이 땅. 천 년의 남자들만 모를 뿐
천 년동안 처용가를 부르며 낄낄대고 웃을 뿐

 

 

 

 

바다 용의 아들 처용은 왕이 중매하여 미녀와 결혼을 한다. 어느 날 처용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역신과 아내가 동침을 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처용은 밖으로 나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이 모습을 본 역신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며 처용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맹세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그려 부적으로 삼았고, 처용이 불렀던 노래는 처용가로 불려졌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처용 설화」의 내용이다. ‘역신을 물리친 처용’을 중심으로 설화는 전승되어 왔고, 우리는 이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런데 시인은 이 설화 자체를 부정하며 ‘처용의 아내’를 변호한다.

 

역신이 흠모하여 처용의 아내를 범했다고 하지만, 어찌되었건 처용의 아내는 간통한 여자로 낙인이 찍혀 버렸다. 부정한 짓을 하여 돌멩이에 맞아 죽어 마땅한 여자는 이 시에 따르면 억울한 여자다. 역신과의 간통 사건은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다. 모든 문제의 시작은 여성의 '몸'월경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을 억압하는 사회적 편견 때문이었다. 처용은 아내가 끌어안고 있던 '개짐'여성이 월경할 때 쓰는 물건. 주로 헝겊으로 만듬을 ‘역신’으로 오해하고, 밖으로 나가 춤을 추고 노래한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처용의 여유와 담대와 관용을 기리고, 질병이 도는 곳에 처용의 얼굴을 붙이고, 처용가를 부르지만 사실 이것은 한 달에 한 번 여자를 찾아오는 자연스런 생명 현상으로 비롯된 것이었다.

 

석불 앞에서 아들을 달라 기도하는 여인들의 한이 한겨울에도 꽃비가 되어 내리고, 종소리 속에서 어린 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천 년 전의 서라벌은 여성의 생리 현상을 비천한 것으로 규정했고, 그 사회적 편견 속에서 처용의 아내는 주홍글씨를 달고 다녀야 했다. 그리고 이 굴레는 천 년의 시간 동안 처용의 아내에게 억울함을 변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천년의 세월 동안 억눌려 있던 말을 쏟아내는 처용 아내의 말은 후련하기도 하지만, 가슴을 아리게도 한다.

 

왜 우리는 천 년 동안 이런 질문을 던지지도 못했을까? 그리고 천 년 전 서라벌과 지금의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다를까? 당연한 듯 마주하고 있는 것들 속에 누군가는 상처받고, 억울해 하고 있지 않을까?

 

간통에 대한 ‘처용 아내의 노래’는 「처용 설화」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보여주며, 이런 설화를 전승하고 있는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당연하다며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져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들과 그 지배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워지기를 촉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