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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백편의자현/詩로빚어낸마음

길은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 신경림「길」

‘길’을 소재로 하는 수많은 시들이 있다. ‘길’이라는 똑같은 대상을 두고, 말하는 이에 따라 각기 다른 ‘길’이 만들어진다. 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같은 노래라도 부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노래가 되는 것처럼 누구의 목소리를 통해 나오느냐에 따라 느낌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오늘은 그 수많은 길들 중 신경림 시인이 50대 중반에 발표한 「길」을 음미해본다.

 

신경림의 「길」을 읽다보면 시인의 연륜과 인생 경험이 느껴지면서 내 자신의 길까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 하는 말이나 자신이 살아온 삶의 깊이로 감당하기 어려운 말은 제아무리 거창한 이야기라도 진실을 담을 수 없다. 반면 연륜이 있는 이의 풍부한 인생 경험을 담은 말은 듣는 이의 고개를 저절로 끄덕이게 한다.

 

쓰러진 자의 꿈

신경림 | 창비 | 1993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 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길의 일부 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길은 길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도를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길은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거나 목적지를 잃어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한 곤경에 처할 때마다 사람들은 길이 자신들에게 어떤 “슬기를 가르치”기 위해,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 그런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 또한 길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길은 사람들을 밖으로만 불러내는 것이 아니다. 길의 진짜 목적은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말문이 막혀 버린다. 설사 말한다고 해도 면접에서나 쓰일 법한 이름, 나이, 소속, 전공, 특기 등의 나열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것은 세상에 보이기 위한 겉치레일 뿐 진짜 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흥미를 가지지만, 정작 자신의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력이 안 되면 능력이라도 있어야 하는 사회에서 스펙 쌓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도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길은 소위 말하는 난관을 마련하여 자신의 내부로 뻗어 있는 길을 보게 한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 뻗어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즉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하게 군다.

 

이렇게 길의 깊은 뜻을 깨닫는다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었다는 말은 무지몽매함에서 비롯된 오만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수많은 길들과 우리 안으로 뻗어 있는 여러 갈래의 길들이 있다. 아마도 시인은 다른 사람처럼 밖으로 뻗어 있는 수많은 길을 걸어 본 후, 안으로 난 길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현재 방황의 길에 서 있지만 나도 수많은 길을 걷다보면, 시인처럼 쉰의 나이가 되면 길에 대한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까? … 깨달음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오늘은 스펙이 아닌 진정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