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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백편의자현/詩로빚어낸마음

슬픔을 다스린 웃음이 가득한 시집 … 박성우의 『가뜬한 잠』

가뜬한 잠

박성우 | 창비 | 2007

시는 너무 난해한 것 같다고 불평을 해대던 내게 지인이 박성우 시인의 『가뜬한 잠』을 선물해 주셨다. 시가 어렵다고 말하는 내게 시집을 선물이라며 던져주고 가는 지인의 행동이 황당했지만 첫 장을 펼치고 첫 번째 시를 읽었을 때 왜 이 시집을 선물해 주셨는지 알 수 있었다. 시집에는 시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며, 세상을 잘 들여다보고, 그렇게 본 세상을 담백하게 표현한 것임을 보여주는 시들이 가득했다.

 

박성우 시인은 평범한 일상, 화려한 현학적 표현이 아닌 일상의 언어로 가난했지만 따스했던 추억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웃음을 자아내고, 유쾌한 시들이 많은데도 시집을 덮은 후 슬픔과 애뜻함이 남는 시집 『가뜬한 잠』에 실린 시를 음미해 본다.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을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가도 몽땅 털어 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를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 삼학년

 

 

 

 

배가 고파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던 삼 학년짜리 아이가 있었다. 미숫가루와 사카린, 슈가를 우물에 넣고 두레박을 국자처럼 사용해 섞는다. 아이의 엉뚱한 행동은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 마음을 들여다보면 씁쓸한 맛과 따스함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미숫가루를 우물에 풀어서 더 많은 미숫가루를 먹고 싶어 한 아이의 행동에 가난이란 슬픔이 배어있다. 계속 물이 솟아나는 우물과 국자를 대신한 두레박은 아이의 배고픔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이런 가난은 사랑도 크게 자라나게 했다. 배고픔을 알았던 아이는 배고픈 동네 사람들 모두와 미숫가루를 나누어 먹고자 동네 우물을 선택했다. 우물을 더럽힌 아이의 행동이 예쁘게 보이는 것은 아이의 이런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슬픔을 슬픔으로 남기지 않고, 웃음으로 승화시킨 또 다른 시.

 

 

 

 

눈깔사탕 빨아먹다 흘릴 때면 주위부터 두리번거렸습니다 물론, 지켜보는 사람 없으면 혀끝으로 대충 닦아 입속에 다시 넣었구요

그 촌뜨기인 제가 출세하여 호텔 커피숍에서 첨으로 선을 봤더랬습니다 제목도 야릇한 첼로 음악을 신청할 줄 아는 우아한 숙녀와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만 손등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손이 무지하게 떨렸거든요

그녀가 얼른 내민 냅킨이 코앞까지 왔지만서도 그보다 빠른 것은 제 혓바닥이었습니다

- 버릇

 

 

 

 

웅덩이에 만들어지는 동그라미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 시.

 

 

 

 

웅덩이로 뛰어드는 빗방울은
동그라미를 그리다가 동그라미가 된다
동그라미가 되어 동그라미 안에 갇히고
동그라미가 되어 동그라미 안을 가둔다
안에 갇히고 안을 가두는 발 빠른 동그라미가 된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속빈 동그라미가 되고 속없는 동그라미가 된다
웅덩이로 뛰어드는 빗방울은
그릴 수 있는 가장 큰 반경의 동그라미가 되고
그러나 가장 크지 않은 동그라미가 된다
시작선도 끝선도 없이 그려지는 동그라미,
동그라미 안에 동그라미가 잽싸게 들어가면
동그라미 안의 동그라미도 나울, 동그라미가 된다
웅덩이로 뛰어드는 빗방울은
웅덩이의 엉덩이에 둥글납작 엎드려 퍼지는 동그라미,
고인 빗물이 되어 사라진 수많은 동그라미 위에
동그라미 동그라미 동그라미를 키운다
웅덩이로 뛰어드는 빗방울은
있는 힘껏 빨리, 있는 힘껏 멀리, 있는 힘껏 힘차게
동그라미를 그려 제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웅덩이가 된다

- 동그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