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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백편의자현/詩로빚어낸마음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기형도「질투는 나의 힘」

슬픔과 절망에 빠져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에는 몹시 진한 감정이 담겨 있다. 그런 말은 굳이 길지 않아도 상관없다. 오히려 짧을수록 듣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감정은 더 깊어진다. 우리가 내뱉은 말에는 대부분 감정이 담겨 있지만, 시는 그 감정들 중 좀 더 고조된 감정을 담아내는 듯하다.

 

책장에 고이 모셔놓은 시집들 중 한 권을 빼내 오랜만에 시를 음미한다. 시를 아는 사람은 꼭 읽어봐야 하는 시집이라며 문학도인 친구가 소개해준 시집, 하지만 그 고뇌의 깊이가 너무 깊어 즐기지 못했던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되새기며 읽어보게 된다. 평소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렵게만 느껴지던 시가 어느 날은 가슴 절절히 공감이 될 때가 있다. 특히 마음이 힘들 때.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 문학과지성사

1989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 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 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난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미래의 어느 날 자신의 모습이 기록된 종이가 발견된다. 그 종이에는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울 만큼 수많은 생각이 자신을 괴롭혔고, 갈 곳을 몰라 수없이 방황했으며, 아무런 희망도 없이 탄식과 질투만으로 청춘을 보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많았구나, ~머뭇거렸구나, ~질투뿐이었구나”라는 과거형을 쓰면서 미래에 과거를 회고하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는 시를 쓰고 있는 현재의 자신의 모습의 기록이다. 술에 취한 사람이 같은 말을 반복하듯이 감정에 취해 있는 시인은 이성적 사고가 끊긴 것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자신이 감정을 전달하려 한다. 그리고 이 반복은 그 감정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다. 이런 효과 때문일까 이 시의 “~구나”로 반복은 현재 자신의 모습에 대한 후회와 절망을 배가 되게 한다. 시인은 자신의 모습이 이렇게 비관적인 이유를 알고 있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것. 그런데 자신의 모습을 불행하다 여기면서도 그 불행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똑똑히 밝히며, 사랑이 아닌 질투야말로 자신의 힘이라고 말한다.

 

이 14줄의 글귀를 읽는 동안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답답함이 몰려와 한 줄을 쉬이 넘기지 못했다. 이 답답함이 내 안의 슬픔과 후회의 기억을 하나씩 꺼내게 하고,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삶을 찬찬히 돌아보게 한다. 시인이 비관의 감정에서 벗어나려하기보다 더 깊숙이 빠져든 것처럼 나도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다. 처음엔 허무하고 무겁게만 느껴졌던 시가 점점 ‘나를 좀 더 사랑해야겠다’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이 허무와 절망의 언어가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보듬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왜일까? (정작 창작자인 시인에게는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았던 듯 하지만.)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