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속어나 욕설을 권장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좋지 않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쓰고 있고, 또 쓸 수밖에 없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비속어나 욕설이 착한 말보다 진실한 감정을 더 잘 표현하기도 한다.
정양의 「토막말」의 “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은 자극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사랑해’보다 더 절절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을바다의 노을 진 풍경에 아름답고 슬픈 사연을 품은 모래 위의 「토막말」을 음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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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닷가는 생각만 해도 쓸쓸함이 가득하다. 그런 가을바닷가에 한 사내가 혼자 왔다. 오직 정순이만을 사랑했던 그 사내는 여전히 미치도록 정순이가 보고 싶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사연으로 두 사람은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리움은 더해갔고, 사랑하는 이를 만날 수 없는 현실이 사내를 괴롭혔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삶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가을 바다에라도 갈 수 밖에….
탁 트인 바다와 마주했지만 먹먹한 가슴은 여전하다. 이윽고 사내는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정도로” 큼지막하게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이라고 모래에 새긴다. 미치도록 보고 싶어서, 아무도 보아주지 않을 지라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꾹꾹 모래를, 아니 자신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세상에 ‘사랑해’가 아닌, “보고자파서죽껏다”고 말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여기에 “씨펄”이라고 막말을 덧붙일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있을까? 아마 가을 바다에 갔던 그 사내뿐일 것이다. “씨펄”이라고 말할 줄 아는 그 사내의 ‘정순’만을 위한 토막말은 저녁놀마저도 “진저리 치며” 읽어야 할 정도로 애절하다. 얼마나 보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으면 맞춤법마저도 초월하고, ‘사랑해’라는 평범한 표준어마저 내팽개쳐 버렸겠는가? 사랑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모든 금기를 뛰어넘기라도 할 듯이 사내는 막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비록 “씨펄”이 비속어지만 세상의 어느 말보다 절절하고 아름답게 다가오는 것은, 이 사내의 진한 그리움 때문이리라.
글씨를 다 쓰고 나서도 여전히 가슴이 답답했던 사내는 자신이 써 놓은 말들 근처에서 한참을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그런 사내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은 세상에 없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그의 마음을 몰라주는 정순이처럼, 어느 누구도 그의 토막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라도 알아달라며 그리도 크게 쓴 것일까?
사내가 바닷가를 떠나고 밀물이 몰려온다. 사내의 절규도 흔적 없이 사라져 바다 깊이 가라앉게 될 것이다. 이 소심한 사내의 절규는 그와 정순의 사랑이 그랬던 것처럼, 가을 바닷가를 잠시 물들이고 사라지는 저녁놀처럼 곧 저물고 말 운명이다. 그래서 이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 토막말은 “손등 위의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처럼 시리고 또 시리고, 저리고 또 저리게 한다.
사내가 떠난 가을바닷가는 아름다운 사연을 품었으나, 전보다 더 쓸쓸하다. 바다를 향해 아무리 소리를 쳐도 바다는 그 말을 삼키기만 하고, 파도는 가슴을 더 깊게 후벼 파는 듯하다. 하지만 문득, 이런 사랑 한번 하지 않고 죽는다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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