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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한국사노트

[사회사_조선] 6-3. 천주교의 전파와 박해

17C 베이징왕래사신 → 학문의 대상 → 서학
18C 종교적 대상 → 천주교

1. 천주교의 수용

천주교의 전래, 서학

사회가 혼란해지고 민생이 어려움을 겪는 불안 속에서 서학, 즉 천주교가 전해졌다. 서학은 17C에 베이징을 왕래하던 사신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는데, 처음에는 종교로 인식되기보다는 새로운 학문으로 인식되어 서학이라 불리었다. 천주교는 북인 계열이 처음 전래하였으나, 실학자 이익을 중심으로 한 남인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기 시작하여 학문적 이해를 넓혔다.

* 이수광은 광해군 초에 베이징에 사신으로 갔다 와서 저술한 「지봉유설」에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요약⋅소개하면서 불교와의 차이점을 언급하였다.

조선 후기에 가장 많이 읽힌 천주 교리서는 이탈리아의 마테오리치가 지은 「천주실의」였다. 「천주실의」는 17세기 초에 베이징에서 간행되었고, 곧이어 이수광과 유몽인 등에 의하여 조선에 소개되었다. 이러한 천주 교리서에 대하여 당시 유학자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탐독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실학자인 이익의 경우 천주교가 불교처럼 허망한 종교이고, 천주교의 천당 지옥설은 불교의 윤회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현혹하는 종교라고 하였다.

천주교 신앙운동

학문적 호기심에서 연구되던 서학의 연구가 신앙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1777년(정조1)에 남인 학자 이승훈, 정약종,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이벽 등을 중심으로 ‘교리 연구회’가 발족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유교 근본 윤리인 충⋅효를 바탕으로 크리스트교의 구세 복음 사상을 수용하여 새로운 윤리 체계를 수립하려 하였으며, 중인(中人)⋅평민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천주교 수용의 특징 : 18세기 후반부터 민간 사회에서 신앙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여 크리스트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당시 정치적⋅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남인 계열 실학자들 일부가 천주교 서적으로 읽고 신앙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천주교는 서양의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주체적으로 수용되어 신앙의 터전을 닦았다. 즉, 조선에서의 천주교 신앙 운동은 조선인 스스로에 의하여 전래되고 조선인 스스로에 의해 포교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천주교의 포교 : 정조 8년(1784)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후 신앙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서울에 이어 내포⋅전주 등에도 신앙 공동체 조직이 만들어졌다. 천주교 교세가 확산되어 간 것은 세도 정치로 사회가 혼란해지고 민생이 어려워짐에 따라, ‘모든 인간은 천주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상과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생할 수 있다는 내세적 교리가 공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통 받는 이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고, 특히 여성들 간에 널리 신봉되기 시작하였다.

초기 정부의 태도 : 정부는 천주교가 유포되는 것에 대하여 내버려 두면 저절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현실 세계 부정, 신분 질서의 위협, 조상에 대한 제사 거부 등 조선 사회 기본 질서를 부인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邪敎)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2. 천주교 박해 원인

박해의 배경 : 정조 때에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였던 시파가 정권을 잡았으므로 큰 탄압은 없었지만, 말년에 최초로 천주교 박해사건(신해박해)이 있었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한 직후에 정순왕후(영조의 계비)를 비롯한 노론 강경파인 벽파가 집권하면서 대탄압이 가해졌다(1801). 이 사건으로 천주교 전래에 앞장을 섰던 실학자 및 많은 수의 양반 계층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정부의 입장 : 천주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고 국왕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도록 하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을 가르치고 인륜을 어기는 것이어서 멸륜지교로 규정되었고, 천주교도는 패륜지도로 인식되었다. 실제 천주교에서 동정을 중히 여기고 신부가 독신을 지키는 일은 가족제도를 파괴하는 일이고, 남녀가 한 자리서 그리고 양반⋅상민⋅종의 구별 없이 교유가 되어 있음은 사회질서에 위배되는 것으로, 유교의 사회규범을 근본으로부터 부인하고 오랑캐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유학의 입장에서는 생각하게 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통제책
선왕이 항상 정학(正學)이 밝으면 사학(邪學)이 스스로 꺼지리라 하였으나, 지금 듣건대 사학이 옛과 같아 서울과 기호 지방에서 날로 치성하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인륜이 있으므로서이고, 나라가 나라인 까닭은 교화가 있으므로서이다. 오늘날의 이른바 사학은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어 인륜을 그르치고 가르침을 어겨 스스로 오랑캐나 짐승의 자리에 빠지고 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이에 물들고 속아 그르쳐짐이 마치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듯 하니 이 어찌 불쌍하고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감사⋅수령은 자세하게 이들을 가르치고 타일러 사학하는 자로 하여금 마음을 바꾸도록 하고, 사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조치하여 모든 사람이 평안하게 살도록 힘쓴 선왕의 공을 빛내게 하라. 이와 같이 엄금한 후에도 개전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모반죄로 다스리라. 수령은 믿는 바 지역에 오가작통법을 엄히 하여 그 통 안에 만일 사학하는 무리가 있거든 곧 통주로 하여금 관에 신고하여 다스리게 하고 베어 죽여 남은 종자가 없도록 하라.

- 「순조실록」

박해의 원인
- 사상적 원인 : 평등관⋅내세관은 조선왕조의 근본 질서를 무시하는 것으로 이해
- 사회적 원인 : 조상의 제사거부는 패륜(전례문제), 반상의 계층사회 조직에 위협
- 정치적 원인 : 당쟁⋅정권 투쟁의 구실(신유박해), 서구 식민국가의 접근에 따른 위기의식

천주교의 전파와 유교 의례의 대립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바입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도 영혼은 술과 밥을 받아먹을 수 없거늘 하물며 죽은 뒤에 영혼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먹고 마시는 것은 육신의 입에 공급하는 것이요, 도리와 덕행은 영혼의 양식입니다. 비록 지극한 효자라 할지라도 맛좋은 것이라 하여 부모가 잠들어 있는 앞에 차려 드릴 수 없는 것은 잠들 동안에는 먹고 마시는 때가 아닌 까닭입니다. 잠시 잠들에 있을 동안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영원히 잠들었을 때는 어떻겠습니까? 사람의 자식이 되어 어찌 허위와 가식의 예로써 이미 돌아가신 부모를 섬기겠습니까?

- 정하상 「상재상서」

 

3. 천주교 박해의 내용

추조적발사건(명례방 사건)(1785, 정조9) : 이벽, 이승훈, 정약용, 권철신 등은 김범우의 집(현 명동성당)에서 예배를 보다가 추조(형조) 관헌에게 발각되어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는 금령이 내려졌다. ⇨ 천주교 금압령(1786). 김범우는 귀양 중 사망.

반회사건(1787, 정조13) : 이승훈, 정약용 등이 반촌 김석대의 집에서 성경 강습하다가 적발되어 천주교 금압령이 강화되고 천주교 서적 소각령이 내려졌다. ⇨ 김석대 처형.

신해박해(1791, 정조15) : 진산사건.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자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신주(神主, 죽은 이의 혼백이 담긴 위폐)를 불사르고 부모의 제사를 거부}. 벽파가 상소를 올려서 정조는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윤지충(최초의 순교자)과 권상연은 극형에 처해지고, 진산군은 5년 동안 강등, 진산군수는 귀양을 갔다. 이를 신해박해(진산사건)이라 하며, 천주교의 신앙화 과정에서 전례문제로 순교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신유박해(1801, 순조) :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여 노론 강경파인 벽파가 득세하자 천주교 대탄압이 가해졌다. 집권 벽파가 시파인 남인계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천주교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고, 이때 이승훈(최초의 세례교인), 이가환, 정약종 등 남인 학자와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사형을 당하고, 정약용(강진유배), 정약전(흑산도유배) 등은 유형을 당하였다. 신유박해로 시파 세력은 크게 위축되어 천주교 전래에 앞장 선 실학자와 많은 양반 계층이 교회를 떠났으며, 이를 알리기 위해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당시 베이징에 머물던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하였다.
황사영 백서사건 : 남인파 신자 황사영은 베이징의 서양인 주교에게 신유박해의 전말을 보고하고, 열강이 해군 병력을 동원하여 정부를 위협해서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서한을 비단에 써서 보내려다 관변측에 발각되었다. 즉, 그는 중국 황제의 권위와 프랑스의 무역 등 외세에 힘입어 조선 정부의 천주교 인정을 강제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 일로 그는 대역죄인이 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황사영의 백서(帛書)는 현재 로마 교황청에 남아 있다.

황사영의 백서
위에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에는 어진 신하가 없어서 자칫 불행한 일이 있기만 하면 와르르 무너져 버릴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배 수백 척과 정병 5, 6만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 바로 이 나라 해변에 이르러 국왕에게 글을 보내어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로, 자녀나 재물 때문에 온 것이 아니다. 교종의 명령을 받아 이 지역의 생령을 구원하려는 것이오, 귀국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요, 한 방의 탄환, 한 대의 화살도 쏘지 않고 절대로 티끌 하나 풀 한 포기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영원한 우호의 조약만 맺고는 북치며 춤추며 돌아갈 것이오. …… 서양은 곧 성교(聖敎)의 근본되는 땅으로서 2천 년 이래 모든 나라에 성교가 전해져서 귀화하지 아니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홀로 이 탄알만한 나라만이 다만 명에 순종하지 않을 뿐더러 도리어 강경하게 버티어 성교를 잔혹하게 해치고 성직자를 마구 학살하였습니다. 이러한 짓은 동양에서 200년 이래 없었던 일이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는 것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

*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은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는 중에도 학문 연구에 전념했고 「다산전집」 250권을 저술했다(귀양 후 「여유당전서」 250권 등의 저술을 남김.).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에 귀양 중 155종 어류의 명칭⋅분포⋅형태⋅습성⋅이용도 등을 연구하여 저술한 「자산어보」를 남겨 어류학의 신기원을 이룩하였다.

⇨ 신유박해 이후 시파인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하에서 천주교 탄압이 완화되면서, 모방⋅샤스탱⋅앙베르 등 프랑스 신부들이 몰래 입국, 포교하여 교세가 점차 신장되어 갔다.

정해박해(1827, 순조27) : 전라도 일대에서 많은 신도가 수난을 당했으나 이후 1831년에는 정하상 등의 노력으로 북경 교구로부터 조선 교구가 독립하였다.

기해박해(1839, 헌종5) : 헌종 때 안동 김씨를 대신해서 일어난 벽파인 풍양 조씨 일파는 조만영을 중심으로 다시 가혹한 천주교 탄압을 가하였다. 정하상이 기해박해의 주동자인 당시 우의정 이지연에게 천주교 교리의 정당성을 알리고자 작성한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란 의미의 「상재상서(上宰相書)」를 남겼다. 기해박해로 정하상 등 신도와 앵베르, 모방, 샤스탕 등 서양인 신부들이 희생되었다. 기해박해 이후 정부는 천주교를 더욱 탄압하기 위해 연대 책임제인 오가작통법과 척사윤음(사교금지문, 1839년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발표)을 발표하였다. 그 후 프랑스 신부 학살의 보복으로 세실(Cecile)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침입해 와 책임을 따지며 통상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병오박해(1846, 헌종12) : 풍양 조씨가 몰락하면서 천주교 교세는 다시 확장되었고, 김대건은 최초의 신부로서 청에서 귀국하여 포교활동을 하다가 순교하였다. 그 후 안동 김씨가 재집권하자 천주교 탄압이 완화되어 베르누, 리델 등 프랑스 신부들이 입국하여 포교하였다.

병인박해(1866, 고종3) : 유교적 전통 윤리에 배치되어 몇 차례 탄압을 받았던 천주교는 베르누, 리델 등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교세가 확장되어 탄압을 받은 신도가 2만여 명에 이르렀다. 흥선대원군은 초기에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하여, 프랑스 선교사의 알선으로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여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견제하려 했으나 이 교섭은 실패로 돌아갔다. 때마침 청에서의 천주교 탄압 소식이 전해졌고, 유생들의 강력한 요구도 있어서 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병인박해라 불리는 이 탄압은 교리 자체가 유교적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었고, 당시 천주교도들이 서양 열강의 힘을 빌려 선교의 자유를 얻고자 한 것도 원인이 되었다. 이 박해로 9명의 프랑스 신부들과 남종삼 등 3년간 8,000여 명의 신도가 처형(최대의 박해)당하였으며, 이는 병인양요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5. 천주교의 확산

천주교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기에 탄압이 완화되며 백성들에게 활발히 전파되었다.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서양인 신부들이 몰래 들어와 포교하면서 교세가 점차 확장되었다. 천주교의 교세가 커진 것은 세도정치로 말미암은 사회불안과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불만과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 내세신앙 등의 교리가 일부 백성들에게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신유⋅기해⋅병인박해에도 불구하고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 첫 소개된 이래 1821년에는 조선교구가 독립되었고, 1846년에는 한국 최초로 김대건이 신부가 되었다.

 

6. 천주교 관련 서적

① 천주교를 소개한 책 : 지봉유설(이수광), 어우야담(유몽인)
② 천주교를 배척한 책 : 서학문(신후담), 천학고, 천학문답(안정복)

 

7. 천주교사적 인물들

- 최초의 소개자 : (선조~광해군) 이수광
- 최초의 세례자 : (정조8년) 이승훈
- 최초의 순교자 : (정조15년) 윤지충(바오르)
- 최초의 중국인 신부 : (정조19년) 주문모
- 최초의 외국신부 순교자 : (순조1년) 주문모
- 최초의 서양신부 : (헌종2년) 모방
- 최초의 조선인 신부 : (헌종11년) 김대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