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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한국사노트

[정치사_중세] 5-2. 고려후기 정치의 변동

원 간섭기 고려의 왕권은 이전 시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고 중앙지배층도 개편되었다. 이전 시기부터 존속했던 문벌귀족 가문, 무신정권기에 새로 등장한 가문, 원과의 관계를 통해 성장한 가문 등이 이른바 권문세족을 형성하며 왕의 측근 세력과 함께 권력을 누렸다. 이들은 농장을 확대하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격화시켰다. 이에 대하여 신진 관리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관료의 인사, 농장 문제와 같은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의 노력은 충선왕과 충목왕들의 시기에 시도되었으나, 원의 간섭으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충렬왕(忠烈王, 1274 - 1298, 1298 - 1308)
원 세조의 부마가 된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철저한 친원정책을 표방하며 무신정권 시기 잃었던 왕권을 회복하게 된다.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맞게 바뀌었고, 관제 또한 격을 낮추어 2성6부가 1부4사로 개편되었다. 몽고직제의 영향으로 순마소, 응방 등 새로운 관직이 생겼고 이곳에 속한 관원들은 특권을 누리며 권세가로 성장하였다. 원 세조의 일본정벌전쟁을 지원하며 백성들의 피해가 극에 달했으며, 북방 야인들과 왜구들의 침입마저 잦아져 고려는 더욱 불안해졌다. 이 시기 일연의 『삼국유사』(1281),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 등이 편찬되어 고려민족의 역사적 전통을 일깨운다. 1288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환관 최세연 등이 불법으로 점탈한 토지와 농민을 추쇄하여 속공하였으며, 1294년 관료 홍자번이 백성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올린 ‘편민18사(便民十八事)’를 채택하였다. 충렬왕은 원의 직속으로 있던 동녕부(東寧府)를 원 세조에게 직접 요청하여 돌려받고(1290), 1294년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원나라 성종(成宗)에게서 돌려받으며 국토를 회복하기도 하였다. 또한 경⋅사에 능한 선유(先儒) 7인을 골라 경사교수(經史敎授)에 임명, 국자감에 소속시켜 학생들에게 경⋅사만을 전문적으로 가르치게 하였다(1280). 그 뒤 주자학의 전래로 유학연구의 필요성이 절실해져 독립적인 관청으로 경사교수도감(經史敎授都監, 1296)을 설치하였고, 7품 이하의 관원에게 경서와 사서(史書)를 가르치게 하여 학풍을 쇄신하며 적극적인 유학진흥을 꾀하였다.
충렬왕과 세자 간의 알력이 심해지자 1298년 세자에게 선위, 충선왕이 왕위에 올라 고려제도를 복원하는 등 자주적 기틀을 마련하려고 하다가 7개월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고 충렬왕은 다시 복위된다. 1298년 국학(국자감)을 성균감(成均監, 1308년 성균관으로 개칭)으로 개편하였으며, 1304년 안향(安珦)이 건의로 유학의 진흥을 위한 장학기금으로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이를 양현고(養賢庫, 예종)에 귀속시켜 학교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1301년 양전사업과 국역을 공평히 하기 위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여 농장과 노비제도 개혁을 추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1288, 1301 전민변정도감 설치

충선왕(忠宣王, 1298, 1308 - 1313)
1298년 정월, 정치에 뜻을 잃은 충렬왕의 선위를 받아 즉위한 충선왕은 유교 이념에 따른 관료정치를 회복하고자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한다. 4월에는 인사를 담당하던 정방(政房)을 폐지하여 한림원과 합치고, 5월에는 전면적 관제개혁을 실시하여 종전의 고려 관제를 복구하며 자주적 기틀을 마련하려 하였다. 정방이 맡고 있던 인사행정, 승지방이 맡고 있던 왕명의 출납을 더하며 한림원의 기능을 강화한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여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즉위 7개월 만에 충선왕은 왕위에서 쫓겨나 원으로 호송되었고, 새롭게 설치했던 관청과 관직도 모두 혁파되고 충렬왕 대의 것으로 복원되었다.
1307년 충선왕이 지지하고 있던 무종이 차기 황제로 유력시되자, 충선왕은 충렬왕의 측근인 왕유소 등을 숙청하며 정방을 다시 폐지하여 그 기능을 전리사, 군부사로 이관한다. 이로써 고려 국정의 실권은 충선왕에게로 돌아갔고, 원 무종의 신임을 받아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졌다. 1308년 7월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10년 만에 왕위를 되찾은 충선왕은 기강의 확립, 인재등용의 개방, 공신 자제의 중용, 귀족의 횡포 엄단 등 다시 한 번 혁신정치를 천명하였다. 전농사(典農司)에서 농무사를 파견하여 토지를 조사하고 조세와 부역의 공평, 농업 활성화, 농민 생활 안정을 도모하였다. 왕실의 동성혼을 금지하고, 왕실종친과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는 15성의 재상지종을 지정하였다.

이제부터 만약 종친으로서 같은 성씨에 장가드는 자는 황제의 명령을 위반한 자로서 처리할 것이니, 마땅히 여러 대에 걸쳐 재상을 지낸 집안의 딸을 취하여 부인으로 삼을 것이며, 재상의 아들은 왕족의 딸과 혼인함을 허락할 것이다. … 경주 김씨, 경원 이씨, 철원 최씨, 해주 최씨, 공암 허씨, … 파평 윤씨, 평양 조씨는 여러 대의 공신이요 재상의 종족이니, 가히 대대로 혼인하여 아들은 종실의 여자에게 장가를 들고 딸은 비로 삼을 만하다. -고려사

복위한 지 두 달 만에 충선왕은 제안대군 왕숙에게 왕권대행을 시키고 다시 원으로 건너갔다. 1309년 의렴창에서 각염법(榷鹽法)을 제정하여 소금⋅철을 전매하게 함으로써 한 해에 포 4만 필의 국고수익을 확대하였고, 사원과 권문세가의 소금 독점에 의한 폭리를 막았다. 그러나 토지개혁은 귀족의 반대로 고쳤고, 여러 차례 시도했던 관제개혁은 결국 원나라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수차례의 귀국 상소에도 충선왕은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였고, 1313년 아들 왕도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동시에 조카 왕고를 세자로 세웠다. 더욱이 1316년에는 심양왕의 자리를 왕고에게 물려주며 고려조정은 심왕당(瀋王黨)과 신왕당(新王黨)이 형성되어, 정치적 대립이 심하였다. 충선왕은 연경에 머물면서 고려의 내정간섭은 물론, 실질적인 왕의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숙왕과 불화가 컸다.
왕위에서 물러난 충선왕은 1314년 연경의 저택에 만권당(萬卷堂)을 설치하여 유학을 연구⋅토론하게 했는데, 대표적인 학자로 몽골 최고 학자인 조맹부와 고려 유학자인 안향, 이암, 이제현 등이 있었다. 이를 통해 고려의 학문과 사상이 발전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 1298.4. 정방 폐지 → 사림원 설치(~1298.8. 3개월) / 1307 정방 폐지(왕유소 등 숙청) → 전리사, 군부사로 이관

충숙왕(忠肅王, 1313 - 1330, 1332 - 1339)
1318년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와 노비를 그 본주인에게 환원시키기 위하여 찰리변위도감(拶理辨違都監)을 설치하였으나, 선왕인 충선왕에 의하여 곧 폐지되었다. 원 무종, 인종 대에 권력을 누렸던 충선왕은 1320년에 영종이 즉위하자 입지가 약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토번으로 유배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충숙왕은 충선왕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정방을 다시 설치하였으며, 충선왕의 결정에 의하여 혁파되었던 찰리변위도감을 1321년 ‘拶’자를 ‘察’자로 고쳐 다시 설치하여 개혁을 시도하였다.
왕고의 왕위찬탈 음모와 누차에 걸쳐 원나라에 소환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1330년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가 충혜왕이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자 1332년 복위하였다. 복위 후 원에 바치는 세공을 삭감케하고 공녀와 환관의 징발을 중지하도록 청원하는 등 몇 가지 업적으로 세우지만 정사를 거의 돌보지 않았다.
‣ 1318 찰리변위도감 설치 / 1320.12. 정방 설치(충선왕 실각, 충선왕 세력 제거 위해 설치), 찰리변위도감 다시 설치

충혜왕(忠惠王, 1330 - 1332, 1339 - 1344)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충혜왕은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1339년 충숙왕이 죽자 복위하였다. 충혜왕은 왕실에서 국내 상업과 원과의 무역을 독점하여 사적재산 확대에 주력하였다.

충목왕(忠穆王, 1344 - 1348)
1344년 충목왕이 8세로 즉위하자, 왕후(王煦)와 이제현(李齊賢)은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고려의 폐정개혁에 관심을 나타내는 원나라의 태도에 힘입어, 왕후는 수상인 우정승이 되었고 개혁적 시책을 베풀었다.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인사권을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에 귀속시키고, 원종 때 시행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한 녹과전(祿科田)을 복구·정비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반대 세력 때문에 개혁시책은 성공되지 못하고, 왕후도 1345년 파직되었다. 1346년 12월 왕후는 폐정개혁에 대한 원나라의 명령을 받고 돌아와, 1347년 2월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정치도감은 정치기강을 확립하고 부원세력을 척결하고자 하였고, 농장의 폐단과 수취제도의 문란 시정 등 개혁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기황후의 일족인 기삼만(奇三萬)이 국문 중 옥사(獄死)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정치도감의 관리들은 장형(杖刑)에 처해졌고, 정치도감의 활동은 3개월만에 와해되었다. 그리고 충목왕이 급작스럽게 죽었고, 1349년 정치도감은 폐지되었다. 이후 충정왕이 12세로 즉위하여 보수세력이 득세하였고 정치적 혼란은 지속되었다. 재위 3년 만에 충정왕이 사망하면서 공민왕이 즉위하였고 개혁에 착수하였다.
▶ 1344 정방 폐지 → 1345.1. 다시 설치 / 1347 정치도감 설치 → 1349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