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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웃의 장례식이 두 군데가 있었다. 평소 왕래가 빈번했던 분들이라 그 분들의 생전 모습이 여전히 선명하다. 늘 인자하게 웃으시던 할머니의 가시는 길 평안하시라며 찾은 빈소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먹기에 번다한 모습이다. 어색하게 굳은 영정 사진 앞에 국화를 놓고, 상주와 인사를 하고, 이내 자리를 떴다. 잠시 할머니의 모습을 상기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 장례식이었다. 비단 이 장례식만의 모습은 아니다. 비슷한 모습의 영정사진과 비슷한 옷을 입은 상주들… 장례식장을 찾을 때마다 다른 점은 별로 없다. 누가 돌아가셨든 같은 모습, 같은 절차에 따라 장례는 진행된다. 이런 장례식장의 모습을 보면서 가끔 생각해 본다. 장례식장에 오는 저들 중 과연 망자를 기억하고, 망자를 위해 오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이 장례식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요즘 지인 가족의 부음 소식은 대부분 핸드폰 문자로 받는다. “아무개의 부친상. ○월○일, XX장례식” 대충 이런 형식의 문자이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늘어놓고 있는 이 문자에 거리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김승희 시인의 「한국식 죽음」을 읽고 난 이후일 것이다. 이 시는 신문의 부고란을 그대로 옮겨 놓고 “그런데 누가 죽었다고?”라는 한 문장을 덧붙여 놓은 작품이다. 「한국식 죽음」은 시집에 적혀있지 않았다면 시라는 인식도 못하고 넘어갔을 정도로 황당한 시였다. 이 짧은 시 속에 담긴 ‘한국식 죽음’의 일그러진 모습을 생각해본다.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김승희 | 민음사 | 2000

 

 

 

김금동 씨(서울 지방 검찰청 검사장), 김금수 씨(서울 초대 병원 병원장), 김금남 씨(새한일보 정치부 차장) 부친상, 박영수 씨(오성물산 상무 이사) 빙부상 - 김금연 씨(세화 여대 가정과 교수) 부친상, 지상옥 씨(삼성 대학 정치과 교수) 빙부상, 이제이슨 씨(재미, 사업) 빙부상 = 7일 하오 3시 10분 신촌 세브란스 병원서 발인 상오 9시 364-8752 장지 선산

 

그런데 누가 죽었다고?

 

 

 

 

일간신문에는 각계의 유명 인사들과 관련한 사소한 소식들을 전하는 지면이 있다. 결혼, 인사이동, 죽음 등 그들의 동정을 여러 사람들에게 알린다. 그런데 이 소식들 중 부고란의 형식은 독특하다. 사망일시, 발인일시, 장례장소, 유족의 이름 등은 실려 있지만, 정작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는 보통 찾기 힘들다. 설령 사망자의 이름이 실려 있더라도, 사망자의 이력보다는 유족들의 이름과 사회적 지위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죽은 사람이 무엇을 하고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 부고는 말해주지 않는다.

 

“정승 개 죽은 데는 문상을 가도, 정승 죽은 데는 문상을 안 간다.”라고 했던가? 부고는 산 자를 위한 장치일 뿐, 망자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시의 부고에서도 사망자를 추측할 수 있는 정보는 누구의 아버지이거나 장인 정도라는 것뿐이다. 사망자에 대한 정보보다 유족에 관한 정보, 즉 사망자의 자식이 누구이며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지를 전달하는 데 치중한다. 그러니 “그런데 누가 죽었다고?”라며 묻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죽은 자의 신분은 자식의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조문을 가는 사람들은 망자를 애도하기보다 산 자를 보고 돈을 내고, 산 자를 위해 식장에 좀 머물며 국밥을 먹을 뿐이다.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에 대한 정보로 가득한 부고란은 산 자들을 위해 죽음마저도 이용하려 드는 우리네 일그러진 장례 문화의 단면이다. 부고란은 죽은 자를 두 번 죽이고 있다.

 

부고를 통해 망자는 권세 있는 자리에 앉아있는 세 명의 아들과 세 명의 사위를 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지 않은 아들이나 권력자 남편을 두지 않은 딸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신문의 부고란을 통해 죽음이 알려지는 사람들은 대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며, 그 자손들 또한 권세를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신문에 실리는 부고는 사망자를 애도하거나 문상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보다 사망자와 유족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기능이 더 강하다. 죽은 사람의 아들이 어떤 권세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가, 또 사위들은 누구이며 어떤 지위에 있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또한 이 신문 부고란에는 남성 중심의 한국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망자에게는 사위가 세 명 있는 것으로 보아 딸이 셋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교수를 하는 ‘김금연 씨’ 외에는 딸 이름을 알 수 없다. 혈연인 딸보다도 사회적 권력을 가진 사위들이 더 내세워져 있으며, 사회 활동이 없는 딸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과연 이런 부고가 한 인간의 죽음을 애도하는 참된 부고라고 할 수 있을까? 죽은 이와 권세 없는 자, 딸이 실종된 ‘한국식 죽음’의 삐뚤어진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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