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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속으로콜콜Call/옛소설의 향기

[숙영낭자전] 진실한 사랑을 하는 이들이 겪는 과정, 사랑의 공식

지금은 젊은 남녀가 자유로운 연애를 통해 마음에 드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집안이 정해 준 상대와 얼굴 한 번 보고 혼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연히 전통사회에도 열정적인 사랑이 있었고 자유연애도 존재했지만, 사람들은 중매결혼이나 정략결혼을 반드시 불행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했다. 서로 사랑을 하고, 연예의 과정을 통해 수많은 가능성을 따져 보고, 평생의 반려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매우 현대적인 관습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창작된 「숙영낭자전」은 당시의 통념을 과감히 깨고 파격적인 사랑을 한 연인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오직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삶을 살았던 그들의 러브 스토리를 사랑, 시련, 기적의 사랑을 공식을 적용하여 찬찬히 읽어본다.

첫번째, 사랑에 빠지다 fall in love

한 사람의 매력에 빠져 이 세상 모든 것이 시시하게 보이는 순간 사람들은 ‘사랑’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마치 갑작스런 사고처럼 우연히,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랑은 시작된다. 합리적 이성은 그 기능을 잃게 되고, 한마디로 ‘사랑에 빠지(fall in love)’게 된다. 사랑은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통제할 수 없고,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사랑에 빠져든다.

한 소년이 꿈속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이제 그는 단순히 어린 소년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온종일 그녀를 열렬히 생각했다.

선군은 꿈속에서 본 선녀의 모습이 너무 확연하여 잠을 깨고 난 후에도 그 낭자의 고운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고 맑고 고운 음성이 귀에 쟁쟁(錚錚)히 남아 있어 낭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마치 무엇을 잃은 듯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하며 용모가 초췌해지고 안색이 곧 죽어 가는 사람처럼 안 좋게 바뀌었다.

그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 순간 ‘최고의 행복’이 시작되었으나 ‘최고의 고통’ 또한 함께 시작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리움은 더해갔고, 사랑하는 이를 만날 수 없는 현실은 커다란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 사람 때문에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무너져 가는 마음에 여위어 갔다. 사랑 때문에 괴롭지만 그는 사랑을 멈출 수도 없다. 보고 싶으나 볼 수 없고, 만나고 싶으나 만날 길이 없는 고통은 급기야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고 갔다.

백선군은 오로지 그 낭자를 사모하는 일념(一念)으로 넋을 잃어 만사에 뜻이 없었는지라 그 모습은 참으로 가련하였다. 점점 악화되는 병세 속에서 선군은 마침내 병이 뼈 속 깊이까지 들어 백약(百藥)으로도 고칠 수가 없게 되었으니 드디어 자리에 드러누워 식음(食飮)을 전폐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상사병이었다.

두번째, 시련이 찾아오다

“사랑을 고치는 약은 없다. 만약 있다면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라는 말처럼, 선군의 ‘only you’ 사랑은 결국 이루어졌다. 여느 해피엔딩의 로맨스 소설처럼 만남을 이룬 두 사람은 부부가 되어 늘 사랑하고 공경하며 행복하게 산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가는 그들의 사랑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사랑에는 시련이 있어야 한다는 공식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질투’다. 작가는 이 ‘질투’의 칸에 선군의 시첩 ‘매월’을 집어넣는다. 매월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어보자.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이 시작되었는데 이미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 숙영이 오기 전에는 그나마 자신을 바라봐주던 그가 숙영이 오면서 투명인간 취급이다. 그의 사랑과 관심은 오로지 숙영을 향해 있고, ‘평생 그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감정은 그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급기야 희망이 없는 사랑은 그녀를 치명적인 위험에 빠뜨리고 만다. 선군의 부재와 시아버지의 숙영을 향한 의심은 그녀에겐 다시없을 기회였다.

‘선군이 낭자와 작배(作配)한 뒤로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으니 어찌 애달프지 아니한가? 이번 기회에 낭자를 간통죄로 몰아서 나의 해묵은 원한을 풀리라.’
매월은 아씨 몰래 금은 수천 냥을 훔쳐내어 동류(同類)들을 모아 의논하여 말했다.
“금은 수천 냥을 줄 것이니 누가 나를 위해서 묘계를 행해 주겠소?”

숙영에게 더러운 죄를 씌우기 위해 도리와 모의하고, 거짓을 고하며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다. 자신이 받았던 아픔을 보상받으려 하다가 결국 그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매월이 질투로 인해 자신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비극적인 결말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과 숙영을 향한 질투는 죽음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세번째, 기적이 일어나다

이제 ‘사랑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공식을 대입할 때가 왔다. 매월의 간계로 다른 남자와 간통을 하였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숙영은 결국 자결을 하고 만다. 죽어있는 숙영을 본 선군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리고 이들에게 일어난 기적이란 무엇일까?

누구에게나 다시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의 소중함 때문에, 혹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의 후회 때문에. 둘 다 별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남은 삶은 전혀 다르다. 소중한 시간은 추억으로 남아 위안을 줄 수 있지만, 후회의 순간은 그 때를 떠올리며 자책하거나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숙영의 결백함은 밝혀졌지만 그녀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다. 이미 일어난 일.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 간절하게 돌아가고 싶은 순간.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밤 다시 주막으로 가지 말아야 했다. 아니 그 전에 과거를 보라는 그녀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가지 말아야 했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후회와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녀를 잃었다는 사실을 마주하기도 벅찬데, 여전히 그녀는 산 사람의 모습으로 그 앞에 누워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괴로워했을 그녀를 생각하니 비참한 기분이 든다. 그녀를 지키지 못한 것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솟았다. 무기력해졌다. 갑자기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의미 없고 성가신 것들로 변해 버렸다. 이제 할 일은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다.

“아아, 슬프구나. 성인군자(聖人君子)도 참수를 당하고, 현부열녀도 험한 구설을 만남은 고왕금래(古往今來)에 없지 않은 불행일지나, 이번 낭자같이 지원극통(至怨極痛)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리요? 이것은 도시 나 선군의 불찰로 말미암아 생겨난 불행이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리요? 오늘 그 원수는 갚았거니와, 한 번 죽은 낭자의 화용월태(花容月態)를 어디 가서 다시 만나보리오? 다만 나 또한 마땅히 죽어서 낭자를 따를 것이니, 부모께 불효가 되오나 어찌할 수 없소이다.”

이렇게 죽음을 결심한 선군의 모습을 본 숙영은 옥황상제를 찾아가 부탁을 한다.

‘선군이 저를 따라서 죽고자 하오니, 다시 한 번 저를 세상에 보내서 선군과 미진한 인연을 맺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애걸하니 옥황상제께서 측은히 여기시고, 시신에게 분부하시기를, ‘숙영의 죄는 그만해도 족히 징계(懲戒)가 되었으니 다시 인간으로 내보내어 선군과 못 다한 인연을 잇게 하라!’ 하시고……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숙영이 그의 꿈에 나타났다. 다시 살아날 것이라 그녀가 말했지만 그것은 그가 만들어낸 환상일지 모른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버티는 하루하루가 계속됐다.

하루는 선군이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서 낭자의 빈소에 들어가 보니, 꼼짝도 하지 않던 낭자의 시체가 옆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선군이 놀라서 시체를 만져보자 온기가 완연하여 생기가 돌고 있었다. 선군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곧 부모를 청해 그 신기한 사실을 알리고, 한편으로는 인삼을 달여서 입에 흘려 넣으며 낭자의 수족을 주물러 주었다. 그러자 이윽고 숙영낭자가 눈을 부시시 뜨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이것을 본 시부모와 선군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살아났다. 살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비로소 그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사랑은 신분이나 혈연, 인종이나 국경까지 뛰어넘는다고 한다. 일상적인 제도나 질서를 뒤흔드는 혁명적 에너지를 품고 있다. 사랑에 빠졌을 때 사람들이 전에 없던 엄청난 활기와 초인적인 힘을 지니는 것을 우리는 종종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를 향한 진심어린 사랑은 어떤 커다란 슬픔도 극복하게 하고, 어떤 터무니없는 환상도 현실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는 것을 「숙영낭자전」은 보여주고자 한 것이 아닐까.

「숙영낭자전」 전체를 돌아보면, 천상의 고귀한 혈통을 가진 주인공들이라 뭐가 달라도 달랐다. 몇 년간 학업을 전폐했던 선군은 단번에 장원급제하고, 정절을 의심받고 자결했던 숙영은 진실이 밝혀지자 기적처럼 되살아난다. 덤으로 입신양명한 선군은 아름다운 두 번째 아내까지 얻는다. 정말 고리타분한 결론이지만 이런 러브 스토리는 주인공의 이름만 달리한 채 지금까지도 계속 창작되고 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진실한 사랑’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랑하고, 아파하고, 시련을 겪고, 기적을 일으키는 과정을 반드시 경험한다. 「숙영낭자전」의 ‘사랑의 공식’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