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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속으로콜콜Call/옛소설의 향기

[숙영낭자전]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여기 한 편의 러브 스토리가 있다. 지금은 젊은 남녀가 자유로운 연애를 통해 마음에 드는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집안이 정해 준 상대와 얼굴 한 번 보고 혼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창작된 「숙영낭자전」은 이러한 통념을 과감히 깬 파격적인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직 사랑의, 사랑에 의한, 사랑을 위한 삶을 살았던 이들의 스토리, 조선판 로맨스 소설 「숙영낭자전」을 만나본다.

하늘에서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꿈속에서 만난다. 상사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남자는 여자를 찾으러 떠나고 결국은 만나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졌다. 중간에 시련이 있어 일이 좀 꼬이지만 비범한 능력과 올곧은 성격으로 잘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다가 천상으로 다시 돌아간다.

「숙영낭자전」의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너무 뻔하고 진부한 로맨스로 들리는가? 그럼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겠다.

남자의 이름은 '백선군', 그는 원래 천상에서 비를 다스리던 선관(仙官)이었고, 여자의 이름은 '숙영', 그녀는 선녀였다. 그들은 이미 천상에서 연분을 맺은 사이였으나, 선군이 비를 잘못 내린 탓에 그 벌로 지상에 내려가게 된다. 전생의 기억을 잊고 살던 남자는 꿈에서 전생의 연인이었던 선녀 숙영을 만나고, 상사병에 걸리고 만다. 선군의 상사병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급기야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간다.

상사병에 걸려 죽을 지경이 되자, 숙영은 선군의 꿈에 나타나 자신과 만날 수 있는 길을 일러 준다. 결국 만남을 이룬 두 사람은 정식 혼례도 거치지 않고 먼저 동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숙영을 소개하는 것으로 부부가 된다. ‘춘앵’과 ‘동춘’ 남매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선군이 아내에게만 빠져 학업은 뒷전이다. 아버지가 과거 시험을 종용하자 선군은 아내의 사랑 앞에서는 부귀공명과 입신양명은 그 가치가 가벼운 것이라며 집안 재산이나 축내면서 살겠다 한다. 숙영이 이런 남편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과거길에 오르게 하지만, 한시라도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며 도중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시아버지는 아들이 되돌아온 줄 모르고 혼자 있는 며느리 방에서 외간 남자의 인기척을 느끼고 의심을 품는다. 그리고 선군의 시첩이었던 매월에게 숙영을 염탐하라고 지시하는데, 선군이 혼인을 한 후 시비가 된 매월은 숙영을 질투하여 거짓을 고하고, 숙영은 위험에 빠진다. 옥비녀가 돌에 깊이 박히는 기적을 통해 누명을 벗고 시아버지의 사과까지 받아내지만, 정절을 의심받은 숙영은 결국 스스로 가슴을 찔러 자결하고 만다. 시아버지는 아들이 상심할까 걱정하여 아름답고 행실이 단정한 임 소저를 아들의 배필로 정한다.

천상의 고귀한 혈통을 가져서 일까 몇 년간 학업을 전폐했던 선군은 단번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며 그 천재성을 보여준다. 아들이 과거 급제 후 집으로 오기 전에 임소저와 혼례를 치르게 하려고 시아버지는 중간에서 아들을 만난다. 하지만 ‘숙영이 아니면 안 되는’ 일편단심 선군은 첫닭이 울자마자 아내가 있는 고향으로 급히 떠난다.

이제 진실이 밝혀질 차례다. 장원 급제자다운 명철함으로 선군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죄인을 단죄한다. 그리고 죽었던 숙영이 기적처럼 소생하여 사랑하는 이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선군은 아름다운 임 소저를 덤으로 얻는다. 세 사람은 행복하게 살다가 80세가 되자 귀천(歸天)한다.

하지만 선군이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고 무덤에서 제문을 읽으면서 오열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이본(異本)도 있다.

사랑은 신분이나 혈연, 인종이나 국경까지 뛰어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꿈속에서 만나 보물을 전달하고,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면 살지 않겠다는 말에 단번에 장원 급제까지 하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아나는 초인적인 힘은 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떻게 보면 뻔한 스토리이지만, 사랑에는 일상적인 제도나 질서를 뒤흔드는 혁명의 힘이 깃들어 있음을 「숙영낭자전」이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