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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속으로콜콜Call/옛노래 선율

[악장가사] 옥으로 새긴 연꽃이 꽃을 피운다면 …「정석가」

고려가요 「정석가(鄭石歌)」는 불가능한 상황을 전제로 하여, 그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면 임과 이별하겠다는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 작품 중 가장 뛰어나다는 칭송을 받고 있는 「정석가」를 들여다본다.

노래의 제목인 ‘정석(鄭石)’은 노래의 서사에 나오는 ‘딩아 돌하’의 ‘딩’, ‘돌’의 차자이다. ‘딩’과 ‘돌’은 악기의 이름으로 ‘정석’은 그 악기를 의인화한 것이다(그러나 화자가 연모하는 대상의 이름이라는 설 등 이설도 있다).

1연에서 화자는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딩아 돌하 당금(當今)에 계샹이다
딩아 돌하 당금(當今)에 계샹이다
션왕셩(先王聖代)예 노니와지이다

징이여, 돌이여! 지금 계십니까?
태평성대에 노닐고 싶습니다.

► 딩하 돌하 : 명사 ‘딩, 돌ㅎ’에 호격조사 '-아'가 결합한 형태
► 當今(당금) : 지금
► 계샹이다 : 계십니다. 『시용향악보』, 『금합자보』에는 ‘겨샤다’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있다’의 존칭어 ‘계시다’의 고형(古形)으로 '계시/겨시'가 혼용되었다.
► 션왕셩(先王聖代) : 선왕성대는 특정한 왕의 시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 의미로서 요순시절 같은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 노니와지이다 : 노닐고 싶습니다. ‘노니-’는 놀-(遊) 과 니-(行)의 복합 어간이며, '-와-'는 공손형 선어말 어미 ‘’에 연결어미 ‘-아’가 붙은 ‘아’의 후대형이고 ‘-지이다’는 공손함을 나타내는 어미이다.

전6연 가운데 1연은 그 내용이 나머지 내용에 비해 이질적이다. 이는 민간에서 유행하던 연가(戀歌)가 궁중음악으로 채택되면서 임금의 안녕을 비는 송도가(頌禱歌)로 개작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개작 과정에서 성격이 다른 1연이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조선의 수많은 작품에서 ‘임’은 ‘임금’을 의미한다. 첫번째 연이 태평성대에 대한 소망의 표현이니, 이 작품이 사랑하는 임에 대한 영원한 사랑뿐 아니라, 임금에 대한 충성을 노래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5연은 소재만 다를 뿐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설정하여 임과의 이별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삭삭기 셰몰애 별헤 나
삭삭기 셰몰애 별헤 나
구은 밤 닷되를 심고이다
그 바미 우미 도다 삭나거시아
그 바미 우미 도다 삭나거시아
유덕(有德)신 님믈 여와지이다

바삭바삭한 가는 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습니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만
유덕하신 임과 이별하겠습니다.

► 삭삭기 : 바삭바삭한. 문헌에 전혀 보이지 않는 단어로, 불가능한 상황을 설정하고 있는 작품의 특성상 ‘식물이 자라기에 좋지 않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는 모래에 물기가 없는 건조한 상태를 설명하는 의성어.
► 셰몰애 : 가는 모래. ‘몰애’가 ‘모래’로 표기되지 않고 ‘몰애’로 표기된 것은 원래 ‘몰개’였던 것이 ‘ㄹ’아래에서 ‘ㄱ’이 탈락한 것임을 보여준다.
► 별헤 : 명사 ‘별ㅎ(崖’)에 처소격조사 ‘-에’가 결합한 형태로 ‘벼랑에’라는 뜻
► 나 : 악률에 맞추기 위한 무의미한 조흥구
► 구은 밤 : 구운
► 닷되를 : ‘다섯 되를’의 고형으로, ‘五’의 관형형은 ‘닷ㆍ다’이 통용되었다.
► 심고다 : ‘심습니다’의 의미로, ‘심다’는 활용할 때, ‘ㄱ’이 첨가되는 특징이 있고, ‘오’는 어간 첨입 모음이며, ‘-다’는 종결어미이다.
► 바미 : 밤이
► 우미 도다 : 움이 돋아
► 삭나거시아 : 싹 나고서야, 싹이 나 있어야. ‘삭’은 현대어 ‘싹’에 해당하며, ‘-거아’는 ‘거’의 후대형으로 현대어 ‘-고서야’에 해당한다.
► 여와지다 : 여의고(離別) 싶습니다. 이별(離別)의 뜻으로 ‘여, 여희’의 양형이 사용되었으나, 현대어에는 사별(死別)을 뜻하는 ‘여의다’에 그 의미가 축소된 채 형태가 남아있다. ‘-지다’는 공손한 바람을 나타낸다.

옥(玉)으로 련(蓮)ㅅ고즐 사교이다
옥(玉)으로 련(蓮)ㅅ고즐 사교이다
바회 우희 접듀(接柱)요이다
그 고지 삼동(三同)이 퓌거시아
그 고지 삼동(三同)이 퓌거시아
유덕(有德)신 님 여와지이다

옥으로 연꽃을 새깁니다.
(그 꽃을) 바위 위에 뿌리내리게 합니다.
그 꽃이 세 묶음이 피어나야만
유덕하신 임과 이별하겠습니다.

► 蓮ㅅ고즐 : ‘곶’은 ‘꽃’의 고형으로 ‘고’의 오기로 볼 수 있다.
► 사교다 : 어간 ‘사기-(刻)’와 어간첨입모음 ‘오’, 종결어미 ‘-다’의 결합형으로 현대어 ‘새깁니다’에 해당한다.
► 바회 우희 : ‘바회’는 ‘바위’를 뜻하며, ‘우ㅎ(上)’는 ㅎ종성체언이므로 처소부사격조사 ‘-의’가 붙어 ‘우희’가 되었다.
► 접듀(接柱)요다 : ‘接’은 ‘잇다, 접붙이다’, ‘住’은 ‘살다’의 뜻으로 ‘뿌리내리게 하다’의 뜻으로 볼 수 있다. ‘(爲)-’에 어간첨입모음 ‘-오-’와 종결어미 ‘-이다’가 결합한 형태이다.
► 삼동(三同) : 세 묶음, 송이, 동강
► 퓌거시아 : ‘피고서야’의 뜻으로 ‘퓌다’는 ‘發’의 의미이다.

므쇠로 텰릭을 아 나
므쇠로 텰릭을 아 나
텰(鐵絲)로 주롬 바고이다
그 오시 다 헐어시아
그 오시 다 헐어시아
유덕(有德)신 님 여와지이다

무쇠로 융복을 재단하여
쇠로 된 실로 주름을 박습니다.
그 옷이 다 해어져야만
유덕하신 임과 이별하겠습니다.

► 므쇠로 : ‘무쇠’의 고형에 부사격조사‘-로’가 결합한 형태
► 텰릭을 : ‘텰릭’은 융복으로, 고관 시종이 입던 의복의 하나이다.
►  : ‘말라, 지어’의 뜻으로 ‘다(裁)’는 ‘마르다, 옷감을 몸에 맞게 자르다’의 뜻이다.
► 텰(鐵絲)로 : ‘쇠실로, 철사로’의 뜻이다.
► 오시 : ‘옷(衣)이’의 연철표기
► 헐시아 : ‘헐거시아’에서 ‘ㄱ’이 탈락한 형태

므쇠로 한쇼를 디여다가
므쇠로 한쇼를 디어다가
텰슈산(鐵樹山)애 노호이다
그  텰초(鐵草)를 머거아
그  텰초(鐵草)를 머거아
유덕(有德)신 님 여와지이다

무쇠로 큰 소를 만들어서
쇠로 된 나무가 있는 산에 놓습니다.
그 소가 쇠로 된 풀을 다 먹어야만
유덕하신 임과 이별하겠습니다.

► 므쇠로 : ‘무쇠’의 고형에 부사격조사‘-로’가 결합한 형태
► 한쇼를 : ‘한’은 ‘하(大)다’의 관형사형이며, 쇼는 ‘소(牛)’이고, ‘-를’은 목적격조사이다.
► 디여다가 : 지어다가(鑄)
► 텰슈산(鐵樹山)애 : 鐵(쇠)+樹(나무,심다)+山 => 쇠로 된 나무가 있는 산
► 노호다 : 현대어 ‘놓습니다’의 고형으로 ‘놓-(放)’에 어간첨입모음 ‘-오-’, 종결어미 ‘-다’가 결합한 형태
►  : ‘쇼’에 주격조사‘ㅣ’가 결합한 형태
► 텰초(鐵草) : ‘쇠로 된 풀’의 의미를 지닌다.
► 머거아 : 원래 ‘머거시아’인데, ‘머거아’로 표기되었다.

‘구운 밤’, ‘옥으로 새긴 연꽃’, ‘무쇠 철릭’, ‘무쇠로 만든 소’는 각각 일어날 수 없는 사실을 설정하기 위해 전제로 삼은 소재들이다. 구운 밤에서 어찌 싹이 나겠으며, 옥으로 새긴, 심지어 바위에 접붙인 연꽃에서 꽃이 피어날 리도 없다. 무쇠로 재단하고 철사로 주름을 박은 제복이 쉽게 해질 리도 만무하다. 결국 여기에는 사랑하는 임과 결코 헤어질 수 없다는 역설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구스리 바회예 디신
구스리 바회예 디신
긴힛 그츠리잇가
즈믄  외오곰 녀신
즈믄  외오곰 녀신
신(信)잇 그츠리잇가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천년을 외로이 살아간들
(임에 대한) 믿음이야 끊어지겠습니까?

► 구스리 : ‘구슬(珠, 玉’)의 연철표기이다.
► 바회예 : 현대어 ‘바위’에 부사격조사 ‘예’가 결합한 것이다.
► 디신 : ‘떨어진들’의 의미로 ‘디다(落)’는 ‘떨어지다’의 의미이고 ‘ㄴ’은 양보를 나타내는 연결어미이다.
► 긴힛 : ‘긴ㅎ’은 ‘끈’이며, ‘-잇’은 ‘이’으로도 표기되며 현대어 ‘-이야’에 해당한다.
► 그츠리가 : ‘긏다(斷,絶)’에 의문문 종결어미‘-리가’가 결합한 형태이다.
► 즈믄  : ‘천년을’의 의미이다.
► 외오곰 : 부사어 ‘외오(誤)’에 강세접미사‘-곰’이 결합한 형태로 ‘외오’는 원래 ‘그릇되다’라는 의미이지만, 남녀가 떨어져 사는 상태를 뜻하므로, ‘따로, 홀로’의 의미도 겸하게 되었다.
► 녀신 : ‘녀다(行)’에 주체존대 선어말 어미‘-시-’와 양보를 나타내는 어미 ‘-ㄴ’이 결합한 형태이다.
► 신(信)잇 그츠리가 : ‘긴힛 그츠리가’와 그 의미는 같으며, ‘긴ㅎ’대신 ‘信’이 쓰였다.

구슬은 임과 나를 말한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다고 해도, 다시 말해서 임과 나에게 어려운 일이 닥친다고 해도 끈이야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서 끈이란 임과 나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사랑 혹은 인연의 끈을 말한다. 천년을 혼자 외로이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사랑에 대한 믿음은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비록 음악적인 장치이긴 하지만, 두 구절의 반복은 임과 나 사이의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한다(이 연은 소위 ‘구슬 노래’라고 하는데, 「서경별곡」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서로 다른 성격의 노래들이 결합하여 「정석가」가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영원한 사랑을 기발한 발상으로 노래한 「정석가」. 화자의 바람처럼 세상엔 이별이 절대 불가능한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