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어역
송도(松都)개성 낙타교(駱駝橋)개성 보정문 안에 있던 탁타교의 또 다른 이름. 고려 태조 때 거란이 낙타 쉰 마리를 바쳤는데, 태조가 받지 않고 이 다리 밑에 매어 두었더니 모두 굶어 죽었다고 함 옆에 이생(李生)이 살고 있었는데, 나이는 열여덟이었다. 풍모가 맑고 재주가 뛰어나 일찍부터 국학(國學)성균관에 다녔는데, 길을 가면서도 시를 읽었다. 선죽리(善竹里)개성 선죽교 부근에 있던 마을 귀족 집에는 최씨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나이는 열대여섯쯤 되었다. 태도가 아리땁고 수도 잘 놓았으며, 시와 문장도 잘 지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풍류로워라 이 총각 이생은 일찍부터 책을 옆에 끼고 학교에 다닐 때에 언제나 최씨네 집 북쪽 담 밖으로 지나다녔다. 수양버들 수십 그루가 간들거리며 그 담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느 날 이생이 그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담 안을 엿보았더니,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고 벌과 새들이 다투어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 곁에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꽃떨기 사이로 은은히 보였다. 주렴이 반쯤 가려 있고 비단 휘장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수를 놓다가 지쳐 잠시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며 턱을 괴고 시를 읊었다. 사창(紗窓)비단 바른 창에 홀로 기대앉아 수놓기도 귀찮구나. 저기 가는 저 총각은 어느 집 도련님일까. 이생은 그 여인이 읊은 시를 듣고 마음이 근질근질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집의 담이 높고도 가파르며 안채가 깊숙한 곳에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서운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흰 종이 한 장에다 시 세 수를 써서 기와 쪽에 매달아 담 안으로 던져 넣었다. 무산 열두 봉우리 첩첩이 쌓인 안개 속에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되어 탁문군(卓文君)을 꾀어내려니사마상여는 전한의 문인으로, 젊었을 때 촉나라 임공 땅을 지나다가 거문고를 타서 부잣집 딸인 탁문군을 꾀어냈다 좋은 인연되려는지 나쁜 인연 되려는지 최랑이 몸종 향아(香兒)를 시켜서 그 편지를 주워다 보니, 바로 이생이 지은 시였다. 최랑이 그 시를 펼쳐서 두세 번 읽고는 마음속으로 혼자 기뻐하였다. 종이쪽지에 여덟 자를 써서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님이여. 의심 마세요. 황혼에 만나기로 해요. 이생이 그 말대로 황혼이 되자 최랑의 집을 찾아갔다. 갑자기 복사꽃 한 가지가 담 위로 넘어오면서 하늘거리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생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넷줄에 대바구니를 매어서 아래로 늘어뜨려 놓았다. 이생은 그 줄을 잡고 담을 넘었다. 마침 달이 동산에 떠올라 꽃 그림자가 땅에 비껴, 맑은 향내가 사랑스러웠다. 이생은 자기가 신선 세계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여 마음은 비록 기뻤지만, 자기의 마음이나 지금 하려는 일이 비밀스러워서 머리칼이 모두 곤두섰다. 이생이 좌우를 둘러보았더니, 최랑은 꽃떨기 속에서 향아와 같이 꽃을 꺾어 머리에 꽂고는, 외진 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최랑이 이생을 보고 방긋 웃으면서 시 두 구절을 먼저 읊었다. 복사나무와 자두나무 가지 속에 꽃송이 탐스럽고복사나무와 자두나무는 재주 많고 아름다운 이생과 최랑을 가리킨다 이생이 뒤를 이어 시를 읊었다. 다음날 어쩌다가 봄소식이 새 나간다면부모의 허락도 없이 만난 이생과 최랑의 비밀스런 사랑이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말함 최랑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말하였다. “저는 본디 당신과 함께 부부가 되어 끝까지 남편으로 모시고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어요. 그런데 당신은 어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저는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마음이 태연한데, 장부의 의기를 가지고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다음날 규중의 일이 누설되어 친정에서 꾸지람을 듣게 되더라도, 제가 혼자 책임을 지겠습니다. 향아야. 방 안에서 술과 안주를 가져오너라.” 향아가 시키는 대로 가버리자, 사방이 고요하여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이생이 최랑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최랑이 말하였다. “이곳은 뒷동산에 있는 작은 누각 아래이지요. 저희 부모님께서는 제가 외동딸이기 때문에 여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연못가에다 이 누각을 따로 지어 주셨지요. 봄이 되어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면 몸종 향아와 함께 즐겁게 놀라고 하신 거지요. 부모님이 계신 곳은 여기서 멀기 때문에 아무리 웃으며 크게 이야기해도 쉽게 들리지는 않는답니다.” 최랑이 술 한 잔을 따라 이생에게 권하면서 고풍(古風)당나라 이전에 있던 옛 시로, 법칙이 엄격하지 않고 자유로웠음으로 한 편을 읊었다. 부용못 푸른 물을 난간에서 굽어보다 이생도 바로 시를 지어 화답하였다. 도원(桃源)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에 무릉도원이 이상향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복사꽃이 만발한 최랑의 집 뒷동산을 표현한 것임에 잘못 들어와 보니 복사꽃이 만발한데 술자리가 끝나자 최랑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오늘의 일은 결코 작은 인연이 아니랍니다. 당신은 저를 따라오셔서 정을 나누는 것이 좋겠어요." 말을 마치고 최랑이 북쪽 창문으로 들어가자 이생도 그 뒤를 따라갔다. (그곳에는) 누각에 달린 사다리가 있었는데,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과연 다락이 나타났다. 문방구와 책상들이 아주 말끔했으며, 한쪽 벽에는「연강첩장도(烟江疊嶂圖)송나라 왕선이 그린 안개 낀 강 위에 첩첩이 싸인 산봉우리를 담은 그림」와 「유황고목도(幽篁古木圖)원나라 화가 가구사가 그린 이래 여러 사람이 그린, 그윽한 대밭과 오래 묵은 나무를 담은 그림」가 걸려 있었는데, 모두 이름난 그림이었다. 그 그림 위에는 시가 씌어 있었는데, 누가 지은 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첫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어떤 사람의 붓끝에 힘이 넘쳐 둘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쓸쓸한 대숲에선 가을 소리가 들리는 듯 한쪽 벽에는 사철의 경치를 읊은 시를 각각 네 수씩 붙였는데, 역시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글씨는 송설(松雪)원나라때 서화가 조맹부의 호. 우리나라에는 송설체를 본받아 글씨를 배운 사람이 많았다의 서체를 본받아 자체가 아주 곱고도 단정하였다. 그 첫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연꽃 그린 휘장은 따뜻하고 향내는 실 같은데 제비 날고 해 길어졌는데 안방 깊숙이 들어앉아 꽃샘추위가 초록 치마를 스쳐 가면 봄빛이 황사양(黃四孃)의 집에 깊이 들어두보가 지은 시에 “황사양의 집에는 꽃이 길에 가득해, 천 떨기 만 떨기가 가지를 무겁게 누르고 있네.”라는 구절이 있다 그 둘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밀 이삭 갓 패고 제비 새끼 날아드는데 매실이 익는 철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푸른 살구 손에 쥐고 꾀꼬리에게 던져 보네. 등나무 평상 대자리에는 무늬가 물결지고 그 셋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가을바람이 쌀쌀하니 찬 이슬이 맺히고 침상 밑에서는 온갖 벌레들이 처량하게 울고 새 옷을 지으려니 가위가 차가워라. 작은 연못에 연꽃도 지고 파초 잎도 누래지자 그 넷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한 매화가지 그림자가 창 앞으로 뻗었는데 밤 서리에 놀란 잎사귀 자주 흔들리고 창에 가득한 붉은 해는 봄날처럼 따뜻한데 쌀쌀한 서리 바람이 북쪽 숲을 스치는데 한쪽에 작은 방 하나가 따로 있었는데, 휘장⋅요⋅이불⋅베개들이 또한 아주 깨끗하였다. 휘장 밖에는 사향[麝]사향노루의 사향샘을 말려서 얻은 향료을 태우고 난초 향 기름의 등불을 켜놓았는데, 환하게 밝아서 마치 대낮 같았다. 이생은 최랑과 더불어 마음껏 즐거움을 누리면서 여러 날 머물렀다. (어느 날) 이생이 최랑에게 말하였다. “옛 성인의 말씀에, ‘어버이가 계시면 나가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곳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제 내가 부모님을 떠난 지가 사흘이나 되었소. 부모님께서 반드시 대문에 기대어 기다리실 테니, 이 어찌 아들의 도리라고 하겠소?” 최랑은 서운하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을 넘어 보내 주었다. 이생을 이 뒤부터 저녁마다 최랑을 찾아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에 이생의 아버지가 이생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네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것은 옛 성인의 어질고 의로운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요즘은 저녁에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반드시 경박한 놈들의 행실을 배워 남의 집 담을 넘어서 아가씨나 엿보고 다닐게다. 이런 일이 만일 탄로 나면 남들은 모두 내가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지 못했다고 책망할 것이다. 또 그 처녀도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이라면 반드시 네 미친 짓 때문에 그 집안을 더럽히게 될 것이다. 남의 집에 죄를 지었으니, 이 일이 작지 않다. 너는 빨리 영남으로 내려가서 종들을 데리고 농사나 감독하거라.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그 이튿날 (이생의 아버지가 이생을) 울주로 내려 보냈다. 최랑은 저녁마다 화원에서 이생을 기다렸지만, 여러 달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최랑은 이생이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여, 향아를 시켜 이생의 이웃들에게 물래 물어 보게 하였다. 이웃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도령은 그 아버지에게 죄를 지어 영남으로 떠난 지가 벌써 여러 달이나 되었다오.” 최랑은 이 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침상에 누웠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일어나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였다. 말도 앞뒤가 맞지 않았으며, 얼굴이 초췌해졌다. 최랑의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 그 병의 증상을 물었지만, 묵묵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딸의 상자 속을 들추어보았더니, 이생과 지난날에 주고받은 시들이 있었다. 최랑의 부모들이 그제야 놀라서 무릎을 치며 말하였다. "어이구. 우리 딸자식을 잃어버릴 뻔했구려." 그리고는 딸에게 물었다. "이생이 누구냐?" 이렇게 되자 최랑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목구멍에서 겨우 나오는 소리로 부모에게 아뢰었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길러 주신 은혜가 깊으니, 어찌 사실을 숨기겠습니까? 저 혼자 생각해보니 남녀가 서로 사랑을 느끼는 것은 인정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결혼할 좋은 시기를 놓치지 마라’는 말은『시경(詩經)』의 주남(周南) 편에도 나타나고, ‘여자가 정조를 지키지 못하면 흉하다’는 말은『주역(周易)』에서도 경계하였습니다. 저는 버들처럼 가냘픈 몸으로 얼굴빛이 시드는 것은 생각지 않고서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옆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새삼 덩굴이 다른 나무에 의지해서 살듯이 저는 벌써 위당(渭塘)의 처녀원나라 금릉에 살던 왕생이 위당에 갔다가 그곳 처녀와 눈이 맞아 마침내 부부가 되었다. 『전등신화』「위당기우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노릇을 하게 되었으니, 죄가 이미 가득 차 집안에까지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 아름다운 도련님[狡童]원래 얼굴은 아름답지만 마음이 아름답지 못한 남자를 가리킨다. 『시경』 정풍 편에 「교동」장의 첫 장에 “저 교활한 사람이 나하고는 말도 하지 않네. 자기 때문에 나는 밥도 못 먹게 되었다네.”라 했다과 한 번 정을 통한 뒤부터는 도련님께 대한 원망[喬怨]‘교생(喬生)에 대한 원망’이란 뜻이다. 원나라 때 교생이 어느 날 저녁에 여경이라는 미인을 만나서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여인이 귀신이라는 것을 알고 관계를 끊었는데, 여경은 이를 원망하여 교생의 손을 잡고 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전등신화』「모란등기」에 나오는 이야기이다이 천만 번 생기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몸으로 괴로움을 참으며 홀로 살아가려니, 그리운 정은 나날이 깊어 가고 아픈 상처는 나날이 더해 가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원한 맺힌 귀신으로 화(化)해 버릴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남은 목숨을 보존하게 되고, 이 간절한 청을 거절하신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생과 저승에서 다시 만나 노닐지언정, 맹세코 다른 가문에는 오르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부모도 이미 최랑의 뜻을 알았으므로 다시는 병의 증세를 묻지 않았다. 타이르고 달래면서 그녀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그리고는 중매쟁이의 예를 갖추어 이생의 집으로 보냈다. 이생의 아버지가 최씨 집안이 얼마나 번성한지 물은 뒤에 말하였다. “우리 집 아이가 비록 어린 나이에 바람이 났지만, 학문에 정통하고 사람답게 생겼소. 앞으로 장원급제할 것이며 훗날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니, 서둘러 혼처를 정하고 싶지 않소.” 중매쟁이가 돌아가서 그대로 아뢰자, 최씨가 다시 (중매인을 이씨 집으로) 보내어 말하게 하였다. “한 시대의 친구들이 모두들 ‘그 댁의 영식(令息)은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아직은 똬리를 틀고 있지만, 어찌 끝까지 연못 속에 잠겨만 있겠습니까? 빨리 혼사 날을 정해 두 집안의 즐거움을 이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매쟁이가 돌아가서 또 그 말을 이생의 아버지에게 전하였더니, 이생의 아버지가 말하였다. “나도 젊었을 때부터 책을 잡고 학문을 닦았지만, 나이 늙도록 성공하지 못하였소. 종들도 흩어지고 친척의 도움도 적어, 생업이 신통치 않고 살림도 궁색해졌소. 그러니 문벌 좋고 번성한 집안에서 어찌 한갓 빈한한 선비를 사위로 삼으려 하시겠소? 이는 반드시 일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우리 집안을 지나치게 칭찬해서 귀댁을 속이려는 것일 거요.” 중매쟁이가 (돌아와서) 또 최씨 집안에 전하자, 최씨 집안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예물 드리는 모든 절차와 옷차림은 모두 저희 집에서 갖추겠습니다. 좋은 날을 가려서 화촉(花燭)의 시기만 정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중매쟁이가 또 돌아가서 이 말을 전하였다. 이씨 집안에서도 이렇게까지 되자 뜻을 돌려, 곧 사람을 보내어 이생을 불러다 그의 생각을 물었다. 이생을 스스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시 한 수를 지었다. 깨어진 거울이 다시 둥글게 되니 만남도 때가 있어 최랑이 이 시를 듣고는 병도 차츰 나아져, 자기도 시를 지었다. 나쁜 인연이 바로 좋은 인연이던가? 이에 좋은 날을 가려 마침내 혼례를 이루니, 끊어졌던 사랑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부부가 된 이후에 서로 사랑하면서도 공경하여 마치 손님처럼 대하니, 비록 양홍과 맹광[鴻光]양홍(梁鴻)은 후한 때 숨어 살던 가난한 선비로, 부잣집 딸인 맹광(孟光)을 아내로 맞이했다. 맹광이 시집와서 화려하게 치장했더니 양홍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맹광이 다시 소박하게 차렸더니 그제야 아내로 받아 주었다. 맹광은 한 고을에 살던 부잣집 딸이었지만, 남편 뜻을 받들어 한평생 밭 갈고 베 짜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 금슬이 좋으면서도 어질게 살았던 부부의 이상으로 꼽힌다.이나 포선과 환소군[鮑桓]포선(鮑宣)은 후한 때의 가난한 선비로 부잣집 딸인 환소군(桓少君)을 아내로 맞이했다. 시집갈 때 환소군의 집에서 보내는 재물이 매우 풍성하였는데, 포선이 이를 기뻐하지 않자 환소군은 하인과 의복, 장식품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짧은 베치마로 갈아입고, 포선과 함께 작은 수레를 타고 시집으로 갔다. 환소군은 남편의 뜻을 잘 받들어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부부가 매우 화목했다고 한다이라도 그들의 절개와 의리를 따를 수가 없었다. 이생이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자, 그의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다. 신축년(辛丑年)고려 공민왕 10년인 1361년. 이 해에 홍건적 십만여 명이 고려를 침략했다 홍건적(紅巾賊)붉은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어 표시를 한 도적. 중국 원(元)나라 말기에 하북(河北)의 한산동(韓山董)을 두목으로 하여 생겨난 도적의 무리. 고려 말에 두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를 침범하였음.이 서울을 함락시키자 왕은 복주(福州)경상북도 안동의 옛 이름로 피난 갔다.고려 말 홍건적이 침입했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홍건적의 침입은 둘의 사랑을 가로막는 ‘세계의 횡포’에 해당된다. 적들은 집을 불태워 없애버렸으며, 사람을 죽이고 가축을 잡아먹었다. 부부와 친척끼리도 서로 돌보지 못한 채 동서로 달아나 숨어서 제각기 살길을 찾았다. (이 때) 이생은 가족들을 데리고 외진 산골로 숨었는데, 한 도적이 칼을 빼어들고 뒤를 쫓아왔다. 이생은 달아나 목숨을 건졌지만, 최랑은 도적에게 사로잡혔다. 도적이 최랑을 겁탈남의 것(물건이나 정조 등)을 폭력으로 빼앗음하려 하자, 최랑이 크게 꾸짖었다. "창귀(倀鬼)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의 혼(魂)으로,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고 호랑이에게 붙어 다니면서 호랑이가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닐 때 앞장 서서 먹이를 찾아 준다고 한다. 못된 짓을 하는 데 남을 인도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같은 놈아. 나를 죽이고 잡아먹어라. 내 차라리 죽어서 시랑(豺狼)승냥이의 밥이 될지언정 어찌 개돼지 같은 놈의 짝이 되겠느냐?" 도적이 노하여 최랑을 죽이고 살을 도려내었다. 이생은 황량한 들판에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전하다가, 도적이 이미 소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이 살던 옛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집은 이미 전쟁으로 불타 없어졌다. 다시 최랑의 집으로 가보았더니 행랑채는 황량했으며, 집안에는 쥐들이 우글거리고, 새들만 지저귈 뿐이었다.전쟁이 휩쓸고 간 뒤 폐허가 된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이생의 슬프고 암담한 내적 심리를 드러낸다 이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지난날 놀던) 별당 누각에 올라가서 눈물을 거두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날이 저물도록 우두커니 홀로 앉아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 보니, 완연히 한바탕 꿈만 같았다. 이경(二更)하룻밤을 다섯으로 나누었을 때, 두 번째 시간. 밤9시부터 11시 사이다쯤 되자 은은한 달빛이 들보를 비추었다. 그때 행랑 아래에서 발자국 소리가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이르고 보니 바로 최랑이었다. 이생은 그녀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깊이 사랑하는 까닭에 의심하지도 않고 물어보았다. "당신은 어디로 피난 가서 목숨을 보전하였소?" 여인이 이생의 손을 잡고 한바탕 통곡하더니, 이내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본디 양갓집 딸로서 어릴 때부터 가정의 교훈을 받아 수놓기와 바느질에 힘썼고, 시서(詩書)와 예법을 배웠어요. 그래서 규방의 법도만 알뿐이지, 그 밖의 일이야 어찌 알겠어요? 마침 당신이 붉은 살구꽃이 핀 담 안을 엿보았으므로, 제가 푸른 바다에서 캐어 올린 구슬을 바친 거지요. 꽃 앞에서 한번 웃고 평생 사랑하며 함께하자 가약(佳約)좋은 언약, 혼약(婚約)을 맺었고, 휘장 속에서 다시 만날 때에는 정이 백년을 넘쳤었지요.” 여기까지 말하자 슬픔이 북받치는 듯했다. 다시 말을 이어 “장차 백년을 함께 하자고 하였는데, 뜻밖에 횡액(橫厄)갑자기 닥쳐오는 불행을 만나 구렁에 넘어질 줄이야 어찌 알았겠어요? 승냥이와 호랑이 같은 도적놈에게 끝까지 정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스스로 진흙탕에 제 몸이 찢겨 죽는 쪽을 택하였습니다.최랑이 왜 죽음을 택하였는지 말해 주는 구절이다. 정조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하였다는 말은 이생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컸음을 말해 준다. 역설적으로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였다고 볼 수 있는 구절이다 하늘의 이치로 보자면 당연한 것이지만, 인간의 정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저는 당신과 그 날 궁벽한 산골짜기에서 헤어진 후 짝 잃어 외로이 나는 새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집도 없어지고 부모님도 돌아가셨으니, 피곤한 혼백을 의지할 곳도 없는 게 한스러웠답니다. 절의(節義)는 중요하고 목숨은 가벼우니, 쇠잔한 몸뚱이일망정 치욕을 면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지요. 그러나 마디마디 끊어진 제 마음을 그 누가 불쌍하게 여겨 주겠어요? 그저 애절하게 썩는 애간장에 원한만 맺힐 뿐입니다. 해골은 들판에 나뒹굴고, 내장은 땅바닥에 흩어지겠지요. 가만히 옛날의 즐거움을 생각해 보니 오늘의 슬픔을 위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추연(鄒衍)이 피리를 불어 따뜻한 기운을 일으켰듯이중국 전국 시대 제나라의 음양 오행가인 추연(鄒衍⋅騶衍)이 추운 지방에서 피리를 불어 날씨를 따뜻하게 했다고 한다 봄이 깊은 골짜기에 돌아왔으니, 천녀(倩女)당나라 진현우가 지은 전기소설 「이혼기(離魂記)」의 주인공. 형주에 살며 왕주를 사랑했지만 아버지 장일이 다른 데로 시집보냈다. 천녀는 왕주와 함께 사천으로 달아나 오 년 동안 함께 살며 자식을 둘 낳았는데, 실제 몸은 병든 채 친정에 누워 있었다. 왕주가 사천에서 함께 살았던 천녀는 영혼이었던 것이다의 혼이 이승으로 돌아왔듯이 제 환신(幻身)허깨비같이 허망하고 덧없는 몸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도 이승으로 돌아와 남은 인연을 맺으려 합니다. 봉래산에서 십이 년 만에 만나자는 약속이 얽혀 있고, 취굴(聚㵠)에서 삼생(三生)의 향이 향기로우니, 오랫동안 뵙지 못한 정을 이제 되살려서 옛날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겠어요. 당신이 지금도 그 맹세를 잊지 않으셨다면, 저도 끝까지 잘 모시고 싶답니다. 당신도 허락하시겠지요?” 이생이 이를 듣고 한편으로 기뻐하고 한편으로 슬퍼하며 말하였다. "그게 애당초 내 소원이오." 그리고는 서로 정답게 심정을 털어놓았다. 재산을 얼마나 도적들에게 빼앗겼는지 이야기가 나오자, 여인이 말하였다. "조금도 잃지 않고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 묻어 두었답니다." 이생이 또 물었다. "두 집 부모님의 해골을 어디에 모셨소?" 여인이 말하였다. "어느 곳에다 그냥 버려두었지요." 서로 쌓였던 이야기를 마치고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지극한 즐거움이 예전과 같았다. 이튿날 여인이 이생과 함께 (재물을 묻어 둔) 곳을 찾아갔는데, 과연 금과 은 몇 덩어리가 있었고, 재물도 약간 있었다. 그들은 두 집 부모님의 해골을 거두고 금과 재물을 팔아 각각 오관산(五冠山) 기슭에 합장하였다. 나무를 세우고 제사를 드려 예절을 모두 다 마쳤다. 그 뒤에 이생은 벼슬을 구하지 않고 최씨와 함께 살게 되었다. 목숨을 구하려고 달아났던 종들도 또한 스스로 돌아왔다. 이생은 이때부터 인간세상의 모든 일을 다 잊어버렸으며, 아무리 친척이나 손님들의 길흉사가 있더라도 방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았다. 언제나 최씨와 더불어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금실 좋게 지내었다. 그럭저럭 몇 년이 지났다. 어느 날 저녁에 여인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세 번이나 가약을 맺었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즐거움이 다하기도 전에 슬프게 헤어져야만 하겠어요.” 여인이 목메어 울자 이생이 놀라면서 물었다. "어찌 이렇게 되었소?" 여인이 대답하였다. "저승길은 피할 수가 없답니다. 천제(天帝)천지를 주관하는 하느님께서 저와 당신의 연분이 끊어지지 않았고 또 전생에 아무런 죄도 지지 않았다면서, 이 몸을 환생시켜 당신과 잠시라도 시름을 풀게 해주었었지요. 그러나 제가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머물면서 산 사람을 미혹시킬 수는 없답니다."사람이 죽더라도 한(恨)이 맺힌 사람은 잠시 이승에 머물 수도 있다는 작가의 내세관과 영혼관이 드러난 부분이다 그리고는 몸종 향아를 시켜서 술을 올리게 하고는, 「옥루춘(玉樓春)노래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사(詞)의 곡조 이름」 곡조에 맞추어 노래 한 가락을 지어 부르며 이생에게 술을 권하였다. 방패와 창이 어우러져 싸움이 가득한 판에 노래를 한 마디 부를 때마다 눈물이 자꾸 내려 거의 곡조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생도 또한 슬픔을 걷잡지 못하며 말하였다. “내 차라리 당신과 함께 구천(九泉)구지(九地)의 바로 밑에 있는 샘으로 황천(黃泉)을 말하며, 흔히 저승을 뜻함으로 갈지언정 어찌 무료하게 홀로 여생을 보전하겠소? 지난번 난리를 겪고 난 뒤에 친척과 종들이 저마다 서로 흩어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해골이 들판에 내버려져 있었는데,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장사를 지내 드렸겠소? 옛 사람 말씀에,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는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신 뒤에는 예로써 장사지내라.’ 하셨는데「논어」에 나오는 구절로,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를 강조한 대목이다. 이러한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있도록 해준 아내 최랑에 대한 고마움이 나타나 있다, 이런 일을 모두 당신이 감당해 주었소. 당신은 정말 천성이 효성스럽고 인정이 두터운 사람이오. 나는 당신에게 고맙기 그지없고,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소홍건적이 쳐들어 왔을 때, 이생이 미처 아내 최랑을 돌보지 못하고 혼자만 몸을 피해 목숨을 건진 일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말이다. 당신도 인간 세상에 더 오래 머물다가 백년 뒤에 나와 함께 티끌이 되었으면 좋겠구려.” 여인이 말하였다. "당신의 목숨은 아직 십이 년이 남아 있지만, 저는 이미 귀신의 명부[鬼籙]에 실려 있답니다. 그래서 더 오래 볼 수가 없지요. 제가 굳이 인간세상을 그리워하며 미련을 가진다면 저승의 법도를 어기게 되니, 저에게만 죄가 미치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도 또한 누가 미치게 된답니다. 제 유골이 어느 곳에 흩어져 있으니, 만약 은혜를 베풀어주시려면 (그 유골이나 거두어) 비바람을 맞지 않게 해주세요."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눈물만 줄줄 흘렸다. "낭군님,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말이 끝나자 차츰 사라지더니 마침내 자취가 없어졌다. 이생은 (여인의 말대로) 유골을 거두어 부모님의 무덤 곁에다 장사를 지내 주었다. 장사를 지낸 뒤에는 이생도 또한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다가 병을 얻어,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최랑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 주고 이생도 얼마 후 죽고 만다. 아내가 없는 이승에서의 삶은 이생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최랑에 대한 이생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마다 가슴 아파 탄식하며 그들의 아름다운 절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원문
松都有李生者, 居駱駝橋之側. 年十八, 風韻淸邁, 天資英秀. 常詣國學, 讀詩路傍. 善竹里, 有巨室處崔氏, 年可十五六, 態度艶麗, 工於刺繡, 而長於詩賦. 世稱: “風流李氏子. 窈窕崔家娘. 才色若可餐, 可以療飢腸.” 李生嘗挾冊詣學, 常過崔氏之家, 北牆外, 垂楊裊裊, 數十株環列, 李生憩於其下. 一日窺牆內, 名花盛開, 蜂鳥爭喧, 傍有小樓, 隱映於花叢之間, 株簾半掩, 羅幃低垂. 有一美人, 倦繡停針, 支頤而吟曰: 獨倚紗窓刺繡遲, 百花叢裏囀黃鸝. 路上誰家白面郞, 靑衿大帶映垂楊. 生聞之, 不勝技癢, 然其門戶高峻, 庭闈深邃, 但怏怏而去. 還時以白紙一幅, 作詩三首, 繫瓦礫投之曰: 巫山六六霧重回, 半露尖峰紫翠堆. 相如欲挑卓文君, 多少情懷已十分. 好因緣邪惡因緣, 空把愁腸日抵年. 崔氏, 命侍婢香兒, 往取見之, 卽李生詩也. 披讀再三, 心自喜之. 以片簡, 又書八字, 投之曰: “將子無疑, 昏以爲期.” 生如其言, 乘昏而往, 忽見桃花一枝, 過墻而有搖裊之影. 往視之則以鞦韆絨索, 繫竹兜下垂. 生攀緣而踰, 會月上東山, 花影在地, 淸香可愛. 生意謂已入仙境, 心雖竊喜, 而情密事秘, 毛髮盡竪, 回眄左右, 女已在花叢裏, 與香兒, 折花相戴, 鋪罽僻地, 見生微笑, 口占二句, : 桃李枝間花富貴, 鴛鴦枕上月嬋娟. 生續吟曰: 他時漏洩春消息, 風雨無情亦可憐. 女變色而言曰: “本欲與君, 終奉箕帚, 永結歡娛, 郞何言之若是遽也? 妾雖女類, 心意泰然, 丈夫意氣, 肯作此語乎? 他日閨中事洩, 親庭譴責, 妾以身當之. 香兒可於房中, 賫酒果以進.” 兒如命而往, 四座寂寥, 闃無人聲, 生問曰: “此是何處?" 女曰: “此是北園中小樓下也. 父母以我一女, 情鍾甚篤, 別構此樓于芙蓉池畔, 方春時, 名花盛開, 欲使從侍兒遨遊耳. 親闈之居, 閨閤深邃, 雖笑語啞咿, 亦不能卒爾相聞也.” 女酌綠蟻一巵, 口占古風一篇曰: 曲欄下壓芙蓉池, 池上花叢人共語. 生卽和之曰: 誤入桃源花爛熳, 多少情懷不能語. 吟罷, 女謂生曰: “今日之事, 必非小緣, 郞須尾我, 以遂情款.” 言訖, 女從北窓入, 生隨之, 樓梯在房中. 綠梯而昇, 果其樓也. 文房几案, 極其濟楚. 一壁展煙江疊嶂圖, 幽篁古木圖, 皆名畵也. 題詩其上, 詩不知何人所作. 其一曰: 何人筆端有餘力, 寫此江心千疊山. 其二曰: 幽篁蕭颯如有聲, 古木偃蹇如有情. 一壁貼四時景, 各四首, 亦不知爲何人所作. 其筆, 則摹松雪眞字, 體極精姸. 其一幅曰: 芙蓉帳暖香如縷, 窓外霏霏紅杏雨. 燕子日長閨閤深, 懶來無語停金針. 嫩寒輕透綠羅裳, 空對春風暗斷腸. 春色深藏黃四家, 深紅淺綠映窓紗. 其二幅曰: 小麥初胎乳燕斜, 南園開遍石榴花. 黃梅時節雨簾纖, 鸎囀槐陰燕入簾. 手拈靑杏打鸎兒, 風過南軒日影遲. 藤牀筠簟浪波紋, 屛畵瀟湘一抹雲. 其三幅曰: 秋風策策秋露凝, 秋月娟娟秋水碧. 床下百蟲鳴喞喞, 床上佳人珠淚滴. 新衣欲裁剪刀冷, 低喚丫兒呼熨斗. 小池荷盡芭蕉黃, 鴛鴦瓦上粘新霜. 其四幅曰: 一枝梅影向窓橫, 風緊西廊月色明. 林葉頻驚半夜霜, 回風飄雪入長廊. 滿窓紅日似春溫, 愁鎖眉峰著睡痕. 剪剪霜風掠北林, 寒鳥啼月正關心. 一傍, 別有小室一區, 帳褥衾枕, 亦甚整麗. 帳外爇麝臍, 燃蘭膏, 熒煌映徹, 恍如白晝. 生與女, 極其情歡, 遂留數日, 生謂女曰: “先聖有言, 父母在. 遊必有方, 而今我定省. 已過三日, 親必倚閭而望, 非人子之道也.” 女惻然而頷之, 踰垣而遣之. 生自是以後, 無已不往. 一夕, 李生之父, 問曰: “汝朝出而暮還者, 將以學先聖仁義之格言, 昏出而曉還, 當爲何事? 必作輕薄子, 踰垣牆, 折樹壇耳. 事如彰露, 人皆譴我敎子之不嚴, 而如其女, 定是高門右族, 則必以爾之狂狡, 穢彼門戶, 獲戾人家, 其事不小, 速去嶺南, 率奴隷監農, 勿得復還.” 卽於翌日, 謫送蔚州. 女每夕, 於花園待之, 數月不還. 女意其得病, 命香兒, 密問於李生之鄰, 鄰人曰: “李郞, 得罪於家君, 去嶺南, 已數月矣.” 女聞之, 臥疾在床, 轉轉不起, 水醬不入於口, 言語支離, 肌膚憔悴, 父母怪之, 問其病狀, 喑喑不言. 搜其箱篋, 得李生前日唱和詩, 擊節驚訝曰: “幾乎失我女子矣.” 問曰: “李生誰耶?” 至是, 女不能復隱, 細語在咽中, 告父母曰: “父親母親, 鞠育恩深, 不能相匿. 竊念男女相感, 人情至重. 是以, 摽梅迨吉, 咏於周南, 咸腓之凶, 刑於羲易. 自將蒲柳之質, 不念桑落之詩, 行露沾衣, 竊被傍人之嗤. 絲蘿托木, 已作渭兒之行. 罪已貫盈, 累及門戶. 然而彼狡童兮, 一偸賈香, 千生喬怨, 以眇眇之弱軀, 忍悄悄之獨處, 情念日深, 沈痾日篤, 濱於死地, 將化窮鬼. 父母如從我願, 終保餘生, 倘違情款, 斃而有已. 當與李生, 重遊黃壞之下, 誓不登他門也.” 於是, 父母已知其志, 不復問病, 且警且誘, 以寬其心, 復修媒妁之禮, 問于李家. 李氏問崔家門戶優劣曰: “吾家豚犬, 雖年少風狂, 學問精通, 身彩似人, 所冀捷龍頭於異日, 占鳳鳴於他年, 不願速求婚媾也.” 媒者, 以言返告, 崔氏復遣曰: “一時朋伴, 皆稱令嗣才華邁人, 今雖蟠屈, 豈是池中之物. 宜速定嘉會之晨, 以合二姓之好.” 媒者, 又以其言, 返告李生之父, 父曰: “吾亦自少, 把冊窮經, 年老無成. 奴僕逋逃, 親戚寡助, 生涯疎闊, 家計伶俜, 而況巨家大族, 豈以一人寒儒, 留意爲贅郞乎. 是必好事者, 過譽吾家, 以誣高門也.” 媒, 又告崔家, 崔家曰: “納采之禮, 漿束之事, 吾盡辨矣. 宜差穀旦, 以定花燭之期.” 媒者, 又返告之. 李家至是, 稍回其意, 卽遣人, 召生問之. 生喜不自勝, 乃作詩曰: 破鏡重圓會有時, 天津烏鵲助佳期. 女聞之, 病亦稍愈, 又作詩曰: 惡因緣是好因緣, 盟語終須到底圓. 於是, 擇吉日, 遂定婚禮, 而續其絃焉. 自同牢之後, 夫婦愛而敬之, 相待如賓, 雖鴻光鮑桓, 不足言其節義也. 生翌年, 捷高科, 登顯仕, 聲價聞于朝著. 辛丑年, 紅賊據京城, 王移福州. 賊焚蕩室廬, 臠炙人畜. 夫婦親戚, 不能相保, 東奔西竄, 各自逃生. 生挈家, 隱匿窮崖. 有一賊, 拔劍而逐. 生奔走得脫, 女爲賊所虜, 欲逼之, 女大罵曰: “倀鬼殺啗我, 寧死葬於豺狼之腹中, 安能作狗彘之匹乎?” 賊怒, 殺而剮之. 生竄于荒野, 僅保餘軀. 聞賊已滅, 遂尋父母舊居, 其家已爲兵火所焚. 又至女家, 廊廡荒凉, 鼠喞鳥喧. 悲不自勝, 登于小樓, 收淚長噓. 奄至日暮, 塊然獨坐, 佇思前遊, 宛如一夢. 將及二更, 月色微吐, 光照屋梁. 漸聞廊下, 有跫然之音, 自遠而近, 至則崔氏也. 生雖知已死, 愛之甚篤, 不復疑訝. 遽問曰: “避於何處, 全其軀命?” 女執生手, 慟哭一聲. 乃敍情曰: “妾本良族, 幼承庭訓, 工刺繡裁縫之事, 學詩書仁義之方, 但識閨門之治, 豈解境外之修. 然而一窺紅杏之墻, 自獻碧海之珠. 花前一笑, 恩結平生, 帳裏重遘, 情愈百年.” 言至於此, 悲慙曷勝. “將謂偕老而歸居, 豈意橫折而顚溝, 終不委身於豺虎, 自取磔肉於泥沙, 固天性之自然, 匪人情之可忍. 却恨一別於窮崖, 竟作分飛之匹鳥. 家亡親沒, 傷殢魄之無依, 義重命輕, 幸殘軀之免辱. 誰憐寸寸之灰心, 徒結斷斷之腐腸, 骨骸暴野, 肝膽塗地. 細料昔時之歡娛, 適爲當日之愁寃. 今則鄒律已吹於幽谷, 倩女再返於陽閒. 蓬萊一紀之約綢繆, 聚窟三生之香芬郁, 重契闊於此時, 期不負乎前盟, 如或不忘, 終以爲好, 李郞其許之乎?” 生喜且感曰: “固所願也.” 相與款曲抒情. 言及家産被寇掠有無, 女曰: “一分不失, 埋於某山某谷也.” 又問: “兩家父母骸骨安在?” 女曰: “暴棄某處.” 敍情罷, 同寢極歡如昔. 明日, 與生俱往尋瘞處, 果得金銀數錠及財物若干. 又得收拾兩家父母骸骨. 貿金賣財, 各合葬於五冠山麓, 封樹祭獻, 皆盡其禮. 其後, 生亦不求仕官, 與崔氏居焉. 幹僕之逃生者, 亦自來赴. 生自是以後, 懶於人事, 雖親戚賓客賀弔, 杜門不出, 常與崔氏, 或酬或和, 琴瑟偕和, 荏苒數年. 一夕, 女謂生曰: “三遇佳期, 世事蹉跎, 歡娛不厭, 哀別遽至.” 遂嗚咽, 生驚問曰: “何故至此?” 女曰: “冥數不可躱也, 天帝以妾與生, 緣分未斷, 又無罪障, 假以幻體, 與生暫割愁腸, 非久留人世, 以惑陽人.” 命婢兒進酒, 歌玉樓春一闋, 以侑生, 歌曰: 干戈滿目交揮處, 玉碎花飛鴛失侶. 每歌一聲, 飮泣數下, 殆不成腔. 生亦悽惋不已曰: “寧與娘子, 同入九泉, 豈可無聊獨保殘生. 向者, 傷亂之後, 親戚僮僕, 各相亂離, 亡親骸 狼籍原野, 儻非娘子, 誰能奠埋. 古人云: 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盡在娘子, 天性之純孝, 人情之篤厚也. 感激無已, 自愧可勝. 願娘子, 淹留人世, 百年之後, 同作塵土.” 女曰: “李郞之壽, 剩有餘紀, 妾已載鬼籙, 不能久視. 若固眷戀人間, 違犯條令, 非唯罪我, 兼亦累及於君. 但妾之遺骸, 散於某處, 倘若垂恩, 勿暴風日.” 相視泣下數行云: “李郞珍重.” 言訖漸滅, 了無踪迹. 生拾骨, 附葬于親墓傍. 旣葬, 生亦以追念之故, 得病數月而卒. 聞者莫不傷歎, 而慕其義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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