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어주는Girl/느낌표가있는구절

되찾을 수 없는 꿈과 꿈이 만나 … 서정인「강」

 서정인의 「강」은 산골에서 시작하여 험한 여울을 지나 바다에 도달하는 우리네 인생을 ‘강’이라는 상징으로 포착했다. ‘강’은 “하나의 천재가 열등생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과 포개지며, 꿈을 상실하고 초라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소시민의 삶을 보여준다.

 

진눈깨비가 내리던 날, 혼인집에 가는 세 남자와 우연히 만난 한 여자가 각자 자신의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하루를 보낸다. 전직 교사 박씨, 세무서 주사 이씨, 늙은 대학생 김씨는 버스 안에서 알게 된 여자와 같은 곳에서 내린다. 밤늦게 혼인집을 다녀온 세 남자는 거나하게 취한다. 박씨와 이씨는 낮에 만났던 여자의 술집으로 가고, 김씨는 혼자 여인숙에 남는다. 침구를 가지고 김씨의 방에 들어온 소년은 반장이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다. 아이는 학교에서 일등을 했다고 자랑하는데, 김씨는 소년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과거와 아이의 미래를 겹쳐 본다.

 

동네의 천재였던 아이가 “가난과 끈질긴 싸움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비굴하고 피곤하고 오만한 낙오자”로 전락하는 과정을 오롯이 재생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처음 출발할 때 도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곳으로부터 사뭇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인생은 어린 시절 가졌던 꿈을 하나씩 실현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 꿈을 조금씩 버려 가는 여정이기도 하다. 이런 “되찾을 수 없는 것”은 서글픔을 느끼게도 하지만, 추억이라는 이름이 그러하듯 지긋지긋한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지금도 수많은 ‘강’은 자신의 물줄기를 남기며 쉬지 않고 흐르고 있다. 오늘은 삶의 강에 배를 띄우고, “되찾을 수 없는” 꿈을 만나러 가 보자.

 

 

 “일등을 했다구? 좋은 일이다. 열심히 공부해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미국, 영국, 불란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나랏돈이나 남의 돈으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돈 없는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흔한 것이 장학금이다. 머리와 노력만 있으면 된다. 부지런히 공부해라, 부지런히. 자신을 가지고.”

 

그러나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는 입을 다물고 흥얼거렸다. 그 말이 끝나자 그의 머릿속에는 몽롱한 가운데에 하나의 천재가 열등생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 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였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던 것이 훨씬 더 나았다.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된다. 그들은 천재가 가난과 끈질긴 싸움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열등생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몰랐다. 누구나가 다 템스 강에 불을 쳐지를 수야 없는 일이다. 허옇게 색이 바랜 짧은 바지를 입고 읍내까지 몇십 리를 걸어서 통학하는 중학생. 많은 동정과 약간의 찬탄. 이모 집이나 고모 집이 아니면 삼촌이나 사촌네 집을 전전하면서 고픈 배를 졸라매고 낡고 무거운 구식의 커다란 가죽 가방을 옆구리에다 끼고 다가오는 학기의 등록금을 골똘히 생각하며 밤늦게 도서관으로부터 돌아오는 핏기 없는 대학생. 그러다 보면 천재는 간 곳이 없고, 비굴하고 피곤하고 오만한 낙오자가 남는다. 그는 출세할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어떠한 것도 주임 교수의 인정을 받는 일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외국에 가는 기회는 단 하나도 그의 시도를 받지 않고 지나치는 법이 없다. 따라서 그가 성공할 확률은 대단히 높다. 많은 것들 중에서 하나만 적중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적중하느냐 않느냐가 아니라 적중하건 안 하건 간에 그는 그가 처음 출발할 때 도달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곳으로부터 사뭇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아 ─ 되찾을 수 없는 것의 상실함이여!

 

그는 꿈틀인다. 눈을 감은 채 일어나 앉더니 외투와 저고리로부터 동시에 빠져나온다. 아까보다 편한 자세로 다시 눕는다. 그리고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이내 코를 골기 시작한다.

 

 

 

 

 

 

 

 

 

 

 

 

 

 

 

 

 

 

 

 

 

 

 

 

 

 

 

 

 

 

 

 

서정인 | 문학과지성사 | 1976

 

서정인의 단편소설 11편이 수록되어 있다. 담담한 어조, 심심한 이야기들. 하지만 그 속엔 삶을 관조하는 시선이 숨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