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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를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 박노자『거꾸로 보는 고대사』

역사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역사서술방식이다. 랑케로 대표되는 사실로서의 역사, E.H.카로 대변되는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한국사를 배운 후 지겹도록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배우고, 익히면서 간과하는 것 또한 이 역사서술 방식이 아닌가 싶다. 내가 배우는 것이 과거의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고 의심해 보려 하지 않았다. 기록으로서의 역사, 즉 역사는 현재의 선택에 의한 다시 쓰는 현대사라는 것을 생각지 않고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왜 우리는 고대사의 위대성에 집착하는가? 왜 우리는 광개토왕, 근초고왕 등을 중요하게 여기고 수많은 전쟁사를 익히고 있는가?

 

처음 『거꾸로 보는 고대사』를 읽었을 때 솔직히 화가 났었다. 위대한 우리의 역사를 폄하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읽어가면서 나는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고 지나쳤던, 교과서 속 역사적 사건들에 질문을 던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사 쓰기란 현재적 선택의 문제다. 타자에 대한 적대성을 부각하며 국가주의적 내부통합을 강화하기 위해 역사 속의 전란들을 ‘타민족과의 영웅적 항쟁’으로 쓸 수 있는가 하면, 타자들과의 섞임, 어울림, 교류를 중심에 놓은 역사를 저술함으로써 국경을 넘는 지역공동체 만들기를 지향할 수도 있다.

 

역사라는 과거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현재에 대한 인식과 미래에 추구하는 것에 따라 과거의 사실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밖에 없다. “역사 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전쟁보다 민중이 하루하루 사는 일상을 더 주목하는 사회를 그려본다.”는 작가의 말처럼 역사에 대한 좀 더 다양한 질문을 던지며, 칼보다는 민중의 삶이 더 중요한 우리네 역사가 되기를 나도 바라본다.

 

 

 세계 각국의 민족주의적 사학에는 한 가지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현대사를 서술할 때 ‘우리들의 피해’를 강조하여 민족/국민의 상(像)을 역사적 전통성이 있는 ‘피해자’로 그리면서, 고대사의 상(像)은 ‘우리들의 위대성’ 위주로 그린다는 점이다.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타자를 침략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로 인식되지만, 고대사에서는 위대한 정복군주들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곤 한다.

 

고대사를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현존하는 사료를 무비판적으로 따를 때도 있고, 사료와 고고학적 유물을 무시하며 무리한 가설들을 세우는 경우도 있다.  …(중략)…

 

13세기 이전까지는 한반도 여타 지역에 이렇다 할 영향을 주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평양 지방의 지역적 신화 단군신화를 마치 한국적 고대의 상징처럼 만들었던 것을 보라. 물론 초기 민족사학이나 이북의 현재 사학과 달리 현재 이남의 주류사학은 단군을 ‘실재 인물’로까지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랴오둥 지역과 대동강 이북의 지역의 부족연합체[준(準)국가]였던 고조선을 ‘만주를 지배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로 보려는 시각은 이남의 교과서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지린성 주변을 비롯한 남만주 지역을 간접적으로, 군사 거점을 통해 ‘느슨하게’ 지배했던 고구려에 대해 마치 ‘만주를 통치했던 위대한 제국’처럼 매우 과장해서 묘사한다. 또한 고구려의 자기중심적인 소제국적 천하관은 민족사학에 의해 집중적으로 조명되지만, 5세기 중반 이후 일본 열도의 야마토 정권이나 7세기 초반 이후의 신라도 이와 같은 천하관을 가졌다는 사실은 대개 무시된다.

 

이스라엘의 관변 사학자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다윗과 솔로몬 왕국의 강성’에 무한한 애착을 보이듯, 한반도 민족사학자들도 상상에 의해서 사실보다 배가(倍加)된 고조선이나 고구려, 발해 등 북방국가들의 ‘힘’에 계속 끌린다. 그러면서도 ‘중국 식민지’로 폄하돼온 낙랑문화 보급의 중요성이나 고구려와 중원 여러 왕조국가들의 매우 가까운 관계, 고구려에서의 중국 귀화인의 역할 등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우리 선조의 힘’은 ‘우리’만의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동시에 근현대사는 ‘피해’ 기조로 쓴다. ‘국사’ 교과서들이 강조하여 마지않는 일재의 만행(蠻行)이야 말로 홀로코스트 못지않게 엄연히 기억해야 할 사실이지만, 일제의 통치로 토착 지배엘리트들도 커다란 이익을 챙겼다는 사실은 주목하지 않는다. 친미반공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미 제국의 베트남 침략 때 그 종범(從犯)으로 기꺼이 나서 베트남 민중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는 부분 역시 철저히 은폐되곤 한다. “우리 모두 다 같이 외세로부터 피해만 입었다”는 민족주의적 도그마와 잘 어울리지 않게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든 한반도든 관변 내지 민족 사학자들이 ‘위대했던 고대사’와 ‘수난의 근현대사’만을 유독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많지만, 그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과 한반도 두 국가의 매우 높은 군사화 정도다. 초강경 징병제 사회에서, 자랑할 만한 과거의 군사적 ‘위대함’은 꼭 필요하다. 종교, 교육 등 다양한 기능들을 가졌던 신라의 청소년 조직 화랑을 이남의 군대가 ‘정신훈련’용으로 이용하며 세속오계 중 유독 ‘임전무퇴(臨戰無退)’를 강조해온 일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물론 화랑 문화에서 보였던 동성애적 요소들은, 동성애를 ‘계간(鷄奸)’으로 호칭해온 군에게 별 관심사가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군은 신병훈련을 마친 병사들에게 로마제국 군의 공격에 영웅적으로 맞섰다는 마사다 성의 폐허를 배경으로 충성맹세를 하도록 한다.
 
고대의 군사적 영웅담은 현재의 군사주의를 은근히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더불어 솔로몬 왕국의 강성이나 광개토왕의 ‘제국 건설’은 오늘날 지역적 중진국인 이스라엘이나 대한민국의 팽창적 야망과 겹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군사적 야망 위주고,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주로 경제적 팽창 중심이지만, 본질은 같다. 이와 동시에 ‘우리들의 피해’ 위주의 근현대사는 팽창을 도모하는 ‘우리들’의 모든 행위를 무조건 정당화한다. 돌을 던지려는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조준사격하든, 수만 원주민들의 강제위주를 전제로 인도의 오리사 주에 초대형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처럼 아시아 민중들에게 재앙을 안기면서 경제적 ‘세계 도약’을 하든, ‘세습적 피해자’인 ‘우리들’은 절대 자신들을 가해자로 인식하지 않는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박노자 | 한겨레출판 | 2010

 

한국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유명한 박노자 교수가 한반도 고대사 책을 펴냈다. '우리는 민주의 주인이었는가',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였는가', '일본은 언제나 우리의 적이었는가' 등 제목만 들춰봐도 우리 역사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비판 의식이 느껴진다. 단일 민족과 순수 혈통을 강조하는 기존의 고대사 서술은 다문화 사회로 이동하는 새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이 책을 읽으며, 세계성과 다양성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고대사의 매력을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