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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백편의자현/독서_톡톡Talk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았던 … 피츠제럴드『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 케빈 코넬 그림

공보경 역 | 노블마인 | 2009

 

이 책은 앞부분은 케빈 코넬의 그래픽 노블로, 뒷부분에는 원작 소설과 영어 원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픽 노블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첨가가 이 책이 동명의 다른 책들과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말은 그럴 듯하지만 그래픽 노블은 한마디로 만화다.) 케빈 코넬이 1860년~1930년 사이의 패션, 건물구조, 기술발달 수준, 골동품, 볼티모어, 예일, 하버드의 풍경에 대해 광범위한 자료조사를 한 후 그려서 당대 옷차림과 풍경을 일러스트에 정확히 반영했다는 그래픽 노블은 소설을 읽으며 떠올릴 수 있는 장면들을 실제 그림으로 눈 앞에 보여준다. 그것이 책을 읽으며 만끽할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즐거움을 빼앗는 것이 될 수 있기에 장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을 수월하게 이해하는 것에는 확실히 효과가 있는 듯하다. 그리고 만화 속에 나오는 대사 및 지문은 몇몇 지문들을 제외하고는 원작 소설의 문장들을 거의 그대로 살려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원문을 읽을 땐 형식만 다를 뿐 같은 내용을 두 번 읽는다는 느낌이 들어 여느 책을 읽을 때의 내용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야기는 1860년에 주인공 벤자민이 메릴랜드 병원에서 태어나면서 시작된다. 몸도 마음도 일흔 살로 태어난 벤자민은 아버지 버튼을 보자 “내 아버지세요?” 라고 유창하게 말을 하며, 자신의 의견까지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보다 날 당혹케 했던 건 막 태어난 벤자민의 모습이었다. 영화에서 벤자민은 전체적으로 노인의 형상이긴 하지만 작은 아기의 몸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소설에선 173센티미터의 건장한 체격의 노인으로 태어나 유창하게 말까지 한다. 도대체 그 말은 어디서 배운 거지? 뱃속에서 듣고 배운 건가? 작은 아기 침대에 긴 수염을 단 채 큰 몸을 구겨 넣은 채 앉아있는 벤자민의 모습은 “이게 뭐야?”라는 실망감마저 들었다. 그리고 일어나는 많은 의문들. 일흔의 노인이 신생아가 될 수는 있는 건가? 이런 아기를 품고 있었던 어머니의 배는 어떠했을까? 이런 큰 아이를 낳았음에도 건강히 살고 있는 소설 속 어머니에 비해 작은 아이를 낳았던 영화 속 어머니의 죽음은 과연 뭔가? 아무리 소설이라도 엄마 뱃속에 그런 큰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의 늙어버린 아기도 이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니 그냥 넘어가는 수 밖에.

 

태어난 아이에 대한 버튼의 첫 반응은 “맙소사! 사람들이 뭐라겠어? 어쩌면 좋지?”다. 아이에 대한 걱정보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질 지를 먼저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남부 상류층의 평판과 형식에만 신경 쓰는 위선을 폭로하고 풍자하는 부조리극”이라는 이 작품의 평의 단서가 로저 버튼의 이 반응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고뇌에 빠진 버튼 씨의 눈앞에 괴기스러운 풍경이 끔찍할 정도로 생생하게 펼쳐졌다. 바로 이 소름 끼치는 망령과 함께 인파가 가득한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버튼 씨는 신음하며 내뱉었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누구냐고 물어볼 텐데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이 …… 일흔 살의 노인을 “오늘 이른 아침에 태어난 제 아들입니다”라고 소개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노인은 몸에 두른 담요를 여미고 그를 따라 부산한 상점들과 노예시장 — 일순간 버튼 씨는 아들이 차라리 흑인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 고급주택가, 양로원을 지나 터벅터벅 걷겠지.

버튼은 갓 태어난 자신의 아들의 옷을 사기 위해 의류점에 들렀을 때조차도 사교계에서의 자신의 입지가 손상되지는 않을지에 대한 걱정만을 하고 있다.

특대 사이즈의 유소년 옷이라도 찾아 입힌 뒤 길고 무시무시한 턱수염을 자르고 백발을 갈색으로 염색하면 최악의 단점은 가려질 것이다. 볼티모어 사교계에서 버튼 씨 자신의 입지와 자존심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을지 모른다.

의류점에서 로저 버튼이 사온 가장 무도회 의상을 본 벤자민이 옷이 이상하다며 말했을 때, 로저 버튼의 말은 가슴이 아프다. 태어난 것이 부모를 욕되게 했다는 것이니.

“뭔가 이상한 옷 같아요. 난 남들 놀림감이 되고 싶진……”
버튼 씨는 사납게 몰아붙였다.
“넌 이미 날 놀림감으로 만들었어! 이상하게 보이든 말든 신경 끄고 당장 입어. 안 그러면 …… 내가…… 엉덩이를 때려줄 테다.”

하지만 버튼은 아이를 영화에서처럼 버리지는 않았다. 로저 버튼은 노인의 모습을 한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인다. 인생이 거꾸로 펼쳐진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기에 버튼은 보통 아이답게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비록 이 교육이 벤자민에 맞춘 교육이 아니라 부모의 만족을 위한 교육이 되었지만.

그는 벤자민이 아기이므로 아기답게 굴어야 한다고 여겼다. 처음에 버튼 씨는 벤자민이 데운 우유를 거부하자 그럼 굶으라고 했지만, 결국 한발 물러나 아들에게 버터 바른 빵을 허락했고 오트밀까지 허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버튼 씨는 딸랑이를 사와서 벤자민에게 내밀며 단호한 어조로 “갖고 놀아”라고 말했다. 벤자민은 따분한 표정으로 딸랑이를 받아 들고는 낮 동안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흔들어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
물론 벤자민에게 딸랑이 놀이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중략)… 그 뒤로도 버튼 씨는 장난감 병정이며 기차놀이 세트며 솜을 넣어 만든 커다란 동물 인형 따위를 줄기차게 사들고 왔다. 그는 자신을 위해 만든 환상을 완성하고자, 장난감 가게 점원에게 ‘아기가 분홍색 오리 장난감을 입에 넣었을 때 색소가 묻어 나오지 않는지’를 꼼꼼히 따져 묻기까지 했다. 버튼 씨가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벤자민은 장난감에 관심이 없었다.

철저하게 부모 자신들을 위한 교육을 시키고, 관절에 무리를 줘가며 놀아야 하지만 벤자민은 크게 불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받아들이고 부모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부러 말썽까지 피운다.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벤자민의 이런 노력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나는 슬프지만 벤자민 자신은 오롯이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으니……

병원에서 나온 뒤로 벤자민은 주어진 삶을 살아갔다. 그는 아버지가 데려온 동네 꼬마들과 오후 내내 뻣뻣한 관절에 무리가 가도록 팽이치기와 구슬치기 놀이를 해야 했다. 그러다가 새총을 잘못 쏴서 돌멩이로 주방 창문을 깼는데 아버지는 은근히 기뻐했다. 그 뒤 벤자민은 매일 일부러 뭔가를 깨뜨렸다. 자신이 말썽 피울 나이라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고, 천성이 순종적이었기 때문이다.

착한 아들 벤자민의 이런 활약 덕분이었을까 버튼 가는 비교적 만족스런 생활을 한다. 부모님들조차 아들의 기이한 출생 따위는 잊어버릴 정도로 평화로운 생활은 지속된다.

벤자민이 열두 살이 되었을 무렵 부모는 그에게 익숙해졌다. 습관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버튼 부부는 자신들의 아이가 여느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중략)… 벤자민은 아버지에게 가서 결연히 말했다.
“저도 이제 컸으니 긴 바지를 입고 싶어요.”
버튼 씨는 망설이는 투로 대답했다.
“글쎄다. 긴 바지는 열네 살에나 입을 수 있는데 넌 열두 살밖에 안 되었잖니?”
“제가 나이에 비해 몸집이 크잖아요.”
벤자민의 항의에 버튼 씨는 억지를 썼다.
“흠, 잘 모르겠는데. 나도 열두 살 때 너만 했단다.”
그 말은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아들을 정상적인 아이로 여기고 싶은 고집에서 비롯된 착각에 불과했다.

열여덟에 예일대에 들어가게 된 벤자민은 누구도 자신을 열여덟으로 보지 않아 예일대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날 이후 벤자민은 자신의 실제 나이가 아닌 보이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며, 신체나이에 어울리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스무 살에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사교계 진출을 한 벤자민은 힐데가드 몽크리프에게 첫눈에 반하고, 쉰 살의 남자를 좋아한다는 힐데가드의 독특한 취향으로 6개월 뒤 결혼에 골인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벤자민 버튼은 가문의 철물 도매 사업을 크게 번창시키며 사교계의 인정을 받게 된다.

그는 인생의 환락에도 점차 매료되었다. 삶의 즐거움에 대한 열정이 점점 달아오르면서 볼티모어에서 제일 먼저 자동차를 구입해 타고 다녔다. 거리에서 그를 만나면 사람들은 건강하고 활기찬 그의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 친구는 매년 젊어지는 것 같군.”

나이가 들면서 점점 젊어지는 마법을 보여주며 벤자민은 인생의 절정기를 한껏 만끽한다. 하지만 이런 벤자민과는 다르게 점점 늙어가는 아내 힐데가드의 모습은 벤자민에게 더 이상 사랑스럽지가 않다.

벤자민 버튼에게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더는 아내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략)… 결혼 초기에 벤자민은 힐데가드를 숭배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벌꿀 같던 그녀의 머리카락은 지루한 갈색이 되었고 푸른 에나멜 같던 눈동자는 싸구려 도기처럼 광채를 잃었다. 그녀는 따분할 만큼 안정된 생활을 하며 더없이 만족스러워했고 흥분하는 일도 없는데다가 얌전하기 그지없는 취미 활동만 했다. 신혼 때는 힐데가드가 내켜하지 않는 벤자민을 무도회며 만찬회에 끌고 다녔는데, 이제는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사교 모임에 나가기는 해도 별로 열정을 보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닥쳐와 죽는 날까지 머무는 삶의 타성에 완전히 젖어버린 것이다.

미서전쟁이 발발했을 때, 벤자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족을 떠나 육군에 입대한다. 그리고 산후안 언덕에서 세운 공로로 훈장까지 받는다. 3년 후 금의환향한 벤자민은 서른 살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벤자민의 자신에 모습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갈등은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세월을 거스르는 외모 변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분명했다. 지금 그는 서른 살 정도로 보였다. 계속 젊어진다는 점이 기쁘다기보다는 불안했다. 신체 나이가 실제 나이와 같아지면 그 시점부터는 출생 시부터 이어진 괴이한 현상이 멈추기를 바랐건만. 몸서리가 쳐졌다. 앞으로도 이런 변화가 계속되리라는 생각이 들자 끔찍했다.
…(중략)…
“있잖아, 여보…… 모두 나보고 더 젊어진 것 같다더군.”
힐데가드는 경멸 어린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자랑할 일이에요?”
…(중략)…
“어떻게 멈추라는 거야?”
힐데가드는 쏘아붙였다.
“언쟁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올바른 처신과 그렇지 못한 처신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잖아요. 당신이 남들과 다르게 살려고 작정한 거라면 내가 말려도 소용없겠죠. 하지만 그런 식의 변화가 사려 깊은 것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군요.”
“하지만 여보, 나도 멈출 수가 없어.”
“멈출 수 있어요. 그저 젊어지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것뿐일 테죠. 다른 사람들도 당신 같은 가치관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

벤자민이 젊어지는 것이 병이 아닌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힐데가드와 벤자민은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고, 벤자민의 삶의 즐거움에 대한 갈망은 더 커져갔다. 벤자민은 사교계를 휘어잡으며, 골프에선 수준급의 실력을 자랑하게 되었고,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당대 유행하는 춤의 달인이 되었다. 보스톤 춤의 전문가, 머시셔 춤의 달인, 캐슬워크 춤으로 젊은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25년간 경영해 온 철물도매상사를 아들 로스코에게 물려주고 1910년 스무 살 쯤 보이는 벤자민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다. 하버드 풋볼 팀의 일원으로 경기에 출전하여 예일대 풋볼 팀에 대항, 터치다운 일곱 번과 필드 골 열네 번을 기록하면서 학내 최고 유명인사가 된다.

 

하지만 대학 3학년부터는 체중도 줄고, 키도 작아지면서 경기에 나갈 수 없게 되고, 4학년 때는 몸이 마르고 약해지면서 벤자민의 황금기는 막을 내린다. 대학을 졸업한 벤자민은 볼티모어에 돌아와 로스코와 같이 살게 되지만 로스코는 벤자민이라는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1914년 대학을 졸업한 벤자민은 하버드대 학사 학위증을 주머니에 넣고 볼티모어로 돌아왔다. 그 무렵 힐데가드는 이탈리아에서 살았기에 벤자민은 아들 로스코와 같이 살게 되었다. 로스코는 말로는 환영한다면서도 진심으로 따뜻하게 환대해 주지는 않았다. 청소년의 외보인 아버지가 멍하니 집 안을 돌아다닐 때면 로스코는 그를 자기 인생의 방해물로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결혼을 하고 볼티모어의 유력 인사로 자리 잡은 로스코는 가족의 일로 쓸데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중략)…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젊어지시면 곤란해요. 제발 그만 하세요. 이젠 …… 이젠……”
로스코는 적당한 말을 찾느라 얼굴까지 시뻘게지더니 말을 이었다.
“그만 방향을 돌려서 남들처럼 늙어가야죠. 장난이 지나치잖아요. 더는 재미도 없어요. 처신을 똑바로 하시란 말입니다!”

로스코는 벤자민에게 안경을 쓰고, 볼에 가자 구레나룻을 붙이라고 하고, 손님들이 있을 때는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한다. 어릴 때 부모님에 의해 이뤄졌던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꾸며야하는 벤자민의 행보는 아들 로스코에 의해 다시 시작된다. 그러는 중 미국이 연합국에 합류하게 되고, 벤자민은 미 육군 준장 계급을 수여할 테니 군에 복귀하라는 편지를 받게 된다. 벤자민은 즐거운 마음으로 맞춤옷 가게에 가서 제복을 맞추고, 로스코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이 지휘하기로 한 기지로 간다. 하지만 열댓 살 정도로 보이는 벤자민을 미서전쟁의 참전 용사로 보는 이는 없었다. 끊임없이 ‘난 정말 xx살이에요.’라고 외치지만 세상은 ‘사기 치지 마.’라고 대응하는 주변인들과의 충돌은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결국 제복까지 빼앗긴 벤자민은 로스코의 손에 이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몇 년 후 로스코의 첫 아기가 태어났고, 그 아이가 5살이 되었을 때 벤자민은 손자와 같은 유치원에 들어간다.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며 그때그때 몸과 마음의 수준이 대략 일치하는 터라 여댓 살의 벤자민의 유치원 생활은 즐거웠다.

그 무렵 벤자민은 작은 색종이 조각을 가지고 받침과 고리, 그 밖에 흥미롭고 아름다운 모양을 만드는 놀이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한번은 말썽을 피워 구석에서 혼자 벌을 서다가 그만 울고 말았다. 그래도 유치원 생활은 대부분 무척 즐겁고 유쾌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도 좋았고 헝클어진 머리를 이따금씩 쓰다듬어주는 베일리 양의 다정한 손길도 좋았다.

1년 뒤 손자는 학교에 들어갔으나 벤자민은 유치원에 계속 남게 되었다. 유치원만 3년째 다닌 벤자민은 생각이 너무 어려져서 더 이상 유치원을 다닐 수 없었다. 어린 아이가 된 벤자민은 보모 나나의 보살핌을 받게 되고, 마침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의 모든 삶의 우여곡절을 망각한 순수한 아기가 된다.

어린아이가 된 벤자민의 꿈에 괴로운 기억은 머물지 않았다. 용감한 대학 시절과 수많은 소녀의 가슴을 설레게 할 정도로 매력 넘치던 시절의 추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유아용 침대를 둘러싼 희고 안전한 벽, 나나, 가끔 그를 보러 오는 한 남자, 그리고 해 질 무렵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나나가 창밖을 가리키며 ‘해’라고 부르던 커다란 오렌지색 공이 있을 뿐. 해가 사라지면 졸음이 와 눈이 스르르 감겼다……. 어지러운 꿈같은 건 꾸지 않았다. …(중략)… 그 모든 기억이 마치 일어난 적도 없는 듯 벤자민의 머릿속에서 실체 없는 꿈처럼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벤자민은 나이가 들수록 인생에서 느끼는 기쁨의 밀도가 점점 높아지다가 삶이 가장 순수한 아기로 인생을 마친다. 늙어서 죽는 것이 좋은 것일까, 많은 추억마저도 잊어 가며 아기로 죽는 것이 좋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