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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백편의자현/독서_톡톡Talk

'뿌리 깊은 나무'들의 노력과 희생 속에 탄생한 한글 … 이정명『뿌리깊은 나무』

학창시절 배워온 한국사는 단편적인 지식만을 내게 남기고 그 안에 숨쉬고 있는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은 없애버렸다. 몇 년도, 어느 시대에, 누가, 뭘 했다더라 등의 사건 나열식 공부를 강요받던 내게 TV사극이나 영화, 역사소설들은 국사책에서 볼 수 없었던 그 지식 너머의, 살고자 몸부림쳤던 치열한 삶과 정신, 사랑과 희생 등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비록 그 내용이 사실과 다를지라도 관심을 환기시키고, 그 시대의 사람을 쫓고, 그들의 생각을 좇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틀림이 없다. 《무사 백동수》, 《계백》, 《광개토대왕》, 《공주의 남자》 등 사극열풍이라 할 정도로 각 방송사에서 다양한 측면의 사극을 반영하고 있는 지금, 며칠 전 또 다른 사극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사극 매니아답게(?) 원작을 찾았다. 평소 형사물, 사건추리극 등은 없어서 못 볼 정도로 빠져있기에 한글창제반포 전 살인사건이라는 소개는 내 구미에 딱 맞는 이야기였다. 아직 반영 전이었던 《뿌리깊은 나무》에 대한 관심은 도서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원작소설은 E-book까지도 대출이 완료된 상태였다. 며칠의 기다림 끝에 겨우 내 차례가 되어 내 앞에 왔을 땐 우연이라기엔 의미가 있는 한글날이었다.


1권의 첫장을 펼치고 2권 마지막장을 볼 때까지 꼬박 하루의 시간이 걸렸다. 식사를 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오롯이 책에 몰두한 하루였다. 앞부분에서는 마방진의 풀이에 몰두하느라, 중간쯤에서는 오행의 이치를 생각하느라, 마지막에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산 사람들의 마음을 새기느라. 『뿌리깊은 나무』는 고리타분한 학자들의 모임인(?) 집현전을 당대 개혁을 집행하는 역동적 공간으로 재탄생시킴으로, 수업 시간에 배운 역사와는 다른 새로운 역사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무엇보다 한글 창제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주어 여느 때보다 한글날을 한글날답게 보낼 수 있었다.

 

 

 

 

 

 

 

뿌리 깊은 나무

이정명 | 밀리언하우스 | 2006 | 전2권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뿌리깊은 나무』는 세종25년 한글창제 반포 전 집현전 학사들의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해 가는 7일간의 기록이다. 경복궁 내 우물(水)인 열상진원에 집현전에서 분서(火)를 맡은 학사 장성수(2)의 시체가 별견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노련한 겸사복 별감 정보관의 간계로 말단 겸사복 강채윤이 이 사건을 맡게 되고, 분서로를 조사하던 중 채윤은 수수께끼 그림(마방진) 등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첫번째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도 전에 금속활자를 제작(金)하던 윤필(4)이 주자소 화재현장(火)에서 발견되고, 쇠몽둥이(金)로 가격 당한 허담(3)의 시체가 집현전에서 발견된다. 매일밤 이어지는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은 죽은 자들이 남긴 수수께끼의 그림(마방진, 금속활자), 몸에 새겨진 문신, 저주받은 금서, 천추전에 출몰하는 귀신 등 복잡한 단서들과 얽히며 살인자의 정체는 종잡을 수 없게 된다. 채윤은 장성수와 윤필의 죽음에 공통적으로 연관이 있던 무수리 소이를 찾아가지만 사건의 실마리는 찾지 못한다.

 

겨우 연쇄사건이 오행의 원리(水克火, 火克金, 金克木, 木克土, 土克水)에 따라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네번째 살인사건은 막을 수 없었다. 농사직설(土)을 저술한 정초가 경회루 대들보(木)에 목매여 죽었다. 정초의 방을 조사하던 중 서책의 뜯겨 나간 종이 뒷장에서 의문의 그림 지수귀문도를 발견하지만 그것은 더욱 혼란만 줄 뿐이었다. 반인 가리온의 검안을 통해 정초의 사인이 수침할심법임을 알게 되고, 살인법을 전수받았던 대전 호위감 무휼을 추궁하여 무휼의 침쌈지를 조사하지만 증거를 찾지 못한다.

 

모든 사체에는 점문신이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죽기 전 비밀리에 하는 일이 있었다. 강성수는 고려사를 다시 썼고, 윤필은 남녀상열지사를 노래해 금기시하는 고려가요를 수집했으며, 허담은 조선과 변방의 지도제작(닥종이, 木)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또한 채윤은 20여년 전 젊은 선비들을 문란케 한다하여 금서가 된 『고군통서』가 살인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직관한다.

 

격구 게임 중 일부러 성삼문을 낙마시켜 그의 팔에 점문신(1)이 있음을 확인한 채윤은 다음 희생자가 성삼문이며 살인장소는 궐내 흙이 많은 아미산임을 짐작한다. 그날 밤, 채윤은 아미산에 산채로 매장된 성삼문을 구하고, 성삼문에게서 팔에 난 문신과 작약시계에 은밀히 모여 잡학이라 매도되던 천문, 역학, 지리 등을 논한 것을 듣게 된다. 그리고 부제학 정인지를 통해 20여년전 『고군통서』란 서책이 서문난적으로 몰려 모두 분서되고 원본만이 비서고에 있다가 최근 종적을 감춘 것과 이 책이 장인 심온의 억울한 죽음과 명의 속국과도 같은 조선에 대한 안타까움이 적은 세종의 저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고군통서』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 아미산으로 간 채윤은 독화살에 맞아 죽을 뻔하지만 살아난다. 벙어리인 줄 알았던 소이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채윤은 소이를 추궁하고, 소이는 자신의 과거와 모든 사건의 뿌리가 된 비밀을 채윤에게 들려준다. 주상은 은밀히 가리온을 통해 사람의 입구조를 그린 그림으로 벙어리궁녀 소이를 가르치며 집현전 학사들과 한글 창제를 감행했다. 이를 막으려는 정통 경학파와의 대립에서 장영실의 출궁, 궁상각치우를 창안한 박연의 뒷방으로 쫓겨남, 신숙주의 왜나라 사신행, 세자빈의 불명예스런 폐서위 등의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경학과 명을 거스르고 새로운 격물의 시대를 열고자하는 주상의 뜻을 꺾기 위해 최만리 등 사대부들은 『고군통서』를 주상을 위협하려는 도구로 쓰려했다. 『고군통서』를 지켜내려 한 집현전 학사들의 죽음은 정통 경학파의 명분과 직제학 심종수의 탐욕이 만든 음모였음이 밝혀진다.

 

맞닥뜨려야 했다 

 

살인사건을 맡은 말단 겸사복인 채윤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자가 아니다. 뛰어난 지력이나 지혜를 가지지 못한 그는 살인범을 눈 앞에 두고도 체포할 힘조차 없다. 진실과 마주하려 한 채윤에게 생명에 대한 위협과 두려움은 찾아왔다. 주위의 만류를 받아들이고 진실을 향한 열정을 꺾는다면 편안하고 안정된 일상적 삶이 채윤에게 주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이라도 마주보고자 하는 자세야말로 주인공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 아니던가.

 

진실에 대한 간절함은 두려움을 이기게 했다. 그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해도 좋았다. 그것이 누구든 그는 채윤이 간절하게 찾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거나 적어도 채윤이 그것을 간절히 원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었다. 맞닥뜨려야 했다. 그곳에 서책이 있으면 그 서책을, 음모가 있으면 그 음모를, 죽음이 있으면 그 죽음을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미로 같은 수수께끼를 영원히 풀 수 없을 것이다.

 

어리고 약하지만 검은 세력의 위협에 굴하지 않는 채윤의 고군분투는 다가갈 수 없는 영웅이 아닌 약한 인간을 보게 함으로, 약한 나 자신의 모습과 맞물리며 동질감이 들게 한다. 같이 사건을 조사하고, 실마리를 풀기 위해 뛰어다니고, 위협과 맞서며, 채윤이 내가 되고, 내가 채윤이 되는, 그래서 사건의 긴박함은 그대로 내게 전달되고, 실마리를 찾아갈 수록 책에 빠져든다. 작가가 주인공 채윤을 천재로 만들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보수 최만리와 수구 심종수(?)  

 

한홍구 『대한민국사』에서 보수와 수구의 차이를 설명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자신이 지켜야 할 가치를 위해 장엄하게 죽어간 보수주의자들의 모습을 보며 ‘참된 보수’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됐었다.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변할 줄 아는’ 보수와 ‘이대로’를 외치는 수구. 『뿌리 깊은 나무』를 읽으면 읽을수록 오래 전 보았던 『대한민국사』의 내용이 다시 살아났다. 연결점 없어보이던 두 글이 만나 내 머리 속에서 서로 가지를 뻗으며, 두문동 학자였던 소이의 조부나 경학파 수장 최만리의 삶과 직제학 심종수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줬다.


고려왕조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졌다. 그 과정에서 소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고려에 끝까지 충성하며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두문동의 불길 속에서도 끝까지 고려를 위해 목숨 바친 충절. 이것은 조선이 망했을 때 매천 황현이 절명시를 남기며 죽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현은 아편을 준비했다. 그 밤 조선의 마지막 大시인 황현은 절명시를 짓는다. …(중략)… 그는 유서에서 “내가 꼭 죽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라며 “황은이 망극해서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지만” 500년 선비를 키운 나라에서 나라가 망하는 날에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통탄할 노릇이 아니겠냐며 치사량의 아편을 먹었다.

- 한홍구『대한민국사』 中


여기서 나는 채윤과 똑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그런데 그 무능하고 썩은 왕조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절은 무엇인가? 이미 사라진 왕조를 위해 새로운 왕조를 등진 그들은 흘러간 강물을 돌이키려는 어리석은 자들일까? 아니면 자신이 신봉하는 절대적인 가치를 위해 멸사봉공하는 의로운 자들일까? 지금의 자신에게 그들과 똑같은 상황이 주어지고 선택을 강요당한다면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또 다른 보수주의자 최만리. “최만리는 홀로 떨쳐나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남의 이목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주상의 진노 또한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오로지 사장과 도학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전통을 지키려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전통은 과연 어떤 것일까. 보수주의자들은 ‘뿌리 없는’ 것에 대한 깊은 혐오를 가지고 있다. 조선의 적이었던 고려부흥세력이나 세종의 반대편에 서서 반기를 들었던 최만리를 단지 흑백논리에 의해 판단할 수 없는 건 그들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원칙을 지킨 보수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융성의 시대를 위해 목숨 바쳤던 집현전 젊은 학사들과 다르지 않다.

궁궐 어디에나 전쟁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하릴없는 죽음을 택했던가? 그들이 죽어간 이유는 주상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주상이 아니라 주상의 뜻이었다. 그것은 이 시대의 뜻이기도 했다. …(중략)… 거대한 시대의 전쟁에 맨몸으로 나선 자들이 그들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러 시대가 성장하고 발전하여 융성의 시대가 올지라도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부름을 피하지 않고 맞선 그들은 자신들의 피와 살이 융성의 시대를 만드는 한줌 거름이 됨을 기꺼워 할 것이었다.

세종이 서책 두 권을 맡기며 채윤과 소이에게 마지막 하교를 할 때, 채윤이 세종께 묻는다.

“이 시대의 백성들조차 모르는 의로운 현자들의 의로운 싸움을 후세 사람들이 어찌 알겠사옵니까?”
“후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염려하지 않는다. 지금의 백성들이 나의 뜻을 알아주지 않음 또한 서러워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할 일은 지금 나에게 맡겨진 백성들을 염려하는 것일 뿐…”

이 대답은 최만리가 살인자로 지목되어 의금부에서 심문당할 때 금부대장의 질문에 대한 최만리의 대답과 닮아있다.

“새로운 문자라 해야 고작 스물여덟자인데 그토록 많은 한자에 비하면 세발의 피일 터인데 그것을 어찌 그리 두려워했소?”
“무지한 자로군… 새로운 글자는 불과 스물여덟 자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세상을 바꿀 엄청난 힘을 지녔네. 그 문자가 반포되면 이 나라는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된단 말일세. …(중략)… 대국의 말을 버리고 오랑캐의 말을 만들어 쓰는 조선을 대국이 보고만 있겠는가? 온 나라가 전란의 위기에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데 학문한다는 자가 어찌 그냥 두고만 볼 것인가?”

격물을 이용해 백성을 풍요롭게 하려는 세종의 길이나 사장과 도학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최만리의 길은 겉으로는 다르나 실제로는 다르지 않았다. 뜻을 지키며 죽어간 그들의 장엄한 삶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저릿저릿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최만리와 같은 길로 가는 것처럼 보였던 심종수는 끝에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같은 명분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지만 권력에 대한 탐욕, 부에 대한 집착 등의 욕망이 덧칠된 심종수의 명분은 시전상인 윤길주와 손잡고 집현전 학사들을 죽이고, 중국에 『고군통서』를 넘기며 나라를 위태롭게 했다.

시전상인들의 몰락은 그들의 세력 위축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시전상인들과 부적절한 이권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부당한 납역을 받아왔다. 그들은 같은 배를 탄 운명이었다. …(중략)… 모두가 윤길주를 비롯한 시전상인들의 부적절한 상납 고리에 연루된 자들이었다. 윤길주가 자빠지면 그들은 모가지가 부러질 것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동맹을 맺은 운명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보수 최만리, 수구 심종수로 연결되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심종수는 한 번도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적도 없고, 희생한 적도 없었다. 한홍구 교수의 표현처럼 ‘재질도 색깔도 비슷해 보이지만 수구와 보수의 차이는 똥과 된장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격물에 담았던 뜻

 

수수께끼의 문신과 그림, 그리고 경복궁 구석구석의 전각틀에 숨겨진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채윤은 사건의 중심부로 다가간다. 마방진, 지수귀문도, 오행 등 채윤이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며 알게 되는 단서들의 의미는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해주었다. 그리고 열상진원, 향원정, 경회루, 강녕전, 아미산 등 경복궁에 남아 있는 건축물에 숨어 있는 놀라운 상징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 열쇠로 작용하면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 역사와 문화의 비밀을 찾는 재미 또한 쏠쏠했다.

서리가 내린 하얀 땅 위에 반듯한 선을 그었다. 가로로 네 개, 세로로 네 개. 여덟 개의 선들이 정확히 맞물리며 만들어낸 아홉 개의 사각형. 숫자들의 움직임이 복잡해질수록 머릿속은 점점 맑아졌다. 늘어진 해금의 줄을 팽팽하게 조이는 것처럼 탄탄한 긴장감이 머릿속을 날 서게 했다.
“보이는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채윤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렸다.
“진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지금 존재하는 세계를 벗어나야 새로운 세계가 보이느니…” 목소리는 조아린 머리 위로 부드럽게 다가왔다.
“전하! 미천한 것이 요사스런 숫자놀음으로 심기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란 없다. 마방진을 괴이한 숫자놀음이라지만 만학의 근원이 되는 수의 이치를 정묘하게 풀이한 것이니 어찌 요망한 숫자놀음이라고만 하겠느냐?”
…(중략)…
“마방진은 부끄러운 숫자놀이가 아니다. 그 해를 구하려면 내 말을 잘 더듬어 보거라.”
…(중략)… 채윤은 일시에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생각들을 멈추고 그 목소리를 또렷이 떠올렸다.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진 않지만 존재하는 곳…”
주문을 외듯 되뇌며 썼다가 지우고 또 썼던 글자들을 보았다.

그때 머릿속으로 거대한 생각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진실이 서서히 뚜렷해지며 눈앞에 떠올렸다. 그것은 이전에 보지 못한 그림, 보이지 않았던 진실이었다. 채윤은 돌조각을 주워 들고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을 땅 위에 그렸다. 아홉 개의 사각형 속에 갇혀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세계. 완벽한 사각형을 넘어 그 바깥쪽에 존재하는 또 다른 경지. 채윤은 새롭게 생긴 네 개의 사각형 속에 숫자를 써 넣었다.
질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완벽한 질서 속의 숫자는 아홉 개의 숫자들을 반대편으로 옮긴 형상이었다. 1에서 9까지의 숫자는 질서정연한 사선으로 일직선상에 완벽하게 존재했다. 그것이 마방진 안의 혼돈을 떠받친 보이지 않는 조화의 밑그림이었다. 숫자들을 반대편으로 옮긴 후 돌출된 사각형을 손으로 문질러 지웠다. 완벽한 마방진이 만들어졌다. 정사각형의 범위를 벗어난 돌출사각형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머릿속에는 또렷하게 존재했다. 그것이 마방진의 해법이었다. 그 그림은 이전의 사각형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사각형을 벗어난 새로운 공간이 마방진을 있게 만든 진실이었다. 그 진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채윤은 진실을 말하던 부드러운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진실은 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지금 존재하는 세계를 벗어나야 새로운 세계가 보이느니……”

이제 나는 복잡하게만 보이던 마방진을 아무리 많은 칸이 주어지더라도 풀 수 있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질서를 알게 되면 그 칸이 아무리 많아도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의 유명한 구절은 이 마방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좁은 세상에 갇혀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고 사는 우리들에게 이 마방진의 해법은 소설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면 주상전하께서 만드신 통보는 어떤 것입니까?”
“주상전하께서 지니기 편하고 절대 훼손되지 않는 동을 납작하게 만들어 이름을 조선통보라 하였으니 그 모양은 이와 같다.”
정인지는 손바닥 위에서 동그란 큰 원을 그린 후 그 가운데에 작은 네모를 그려 넣었다. 순지의 두 눈이 점점 커졌다. 그것은 향원지를 보고 커지던 정인지의 눈과 다르지 않았다.
“그… 그것은 천원지방의 형상이 아닙니까?”
“그러하다. 향원지와는 정반대의 천원지방이지.”
“그렇군요. 향원지는 평평한 땅이 둥근 하늘을 감싸고 있지만 조선통보는 둥근 하늘이 평평한 땅을 감싸고 있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전하께서는 새 화폐에 아무도 모르는 큰 뜻을 숨겨놓으셨던 것이다.”
“하늘과 땅이 조화롭고 수화목금토가 어울리고 남녀가 즐겁게 화합하고 군신이 아름답게 어울려 만물이 피어나는 경지가 곧 천원지방이 뜻하는 바일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그 원리가 만백성의 손에서 손으로, 품에서 품으로 막힘없이 두루 도는 나라를 꿈꾸셨습니다.”

동전의 모양 하나에서도 우주를 담고자 했던 세종의 뜻은 백성을 향해 있다. 열상진원, 향원정, 경회루, 한글에 내재해 있는 우주 창조의 원리는 ‘오행’이라는 어려운 이론이 아닌 백성을 풍요롭게 하고자 했던 백성을 향한 마음이었다. 건축사 과제 때문에 수시로 찾았던 경복궁이지만 이 순간만큼 생생히 살아있는 경복궁을 만난 적은 없었다. 사람의 숨결이 사라진 고건물 집합소 경복궁이 아닌 치열하게 부딪히며 살았던 경복궁이 마음속에 살아난다.

 

 

 

'뿌리 깊은 나무'들의 노력과 희생 속에 탄생한 한글

 

이 책의 제목 ‘뿌리 깊은 나무’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암시하듯 『용비어천가』에서 따왔다. 모든 사건이 해결된 후 채윤은 세종에게 윤필이 가지고 있었던 활자의 뜻에 대해 묻는다. 윤필이 지니고 있던 금속활자(根, 之, 木, 風, 亦, 源, 之, 水, 旱, 亦, 渴…)는 『용비어천가』 2장의 글자들 중 일부였다. 학교수업에서 시험에 반드시 나온다며 강조에 강조를 거듭한, 용비어천가 125장의 백미, 비유적 상징적 표현수법이 뛰어나며, 중국의 고사가 전혀 쓰이지 않았으며, 서정적 표현으로 교술성을 극복했다는 등의 찬사를 받고 있는 그 유명한 구절.

근심지목풍역불항(根深之木風亦不抗)
원원지수한역불갈(源遠之水旱亦不渴)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리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아니 그치므로, 내가 이루어져 바다에까지 가나니.

교과서나 시험을 벗어나 이 글을 되새기며 작가 이정명의 표현처럼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밀고 올라왔다.

윤필이 목숨을 버려 지킨 것은 뿌리 깊은 나무였다. 장성수, 윤필, 허담, 정초, 장영실, 박연,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목숨을 버려 뿌리 깊은 나무를 지켰던 작약시계의 계원 하나하나가 스스로 뿌리 깊은 나무들이었다.

수많은 ‘뿌리 깊은 나무’들의 노력과 희생 속에 탄생한 한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만든 사람과 반포일, 창제원리까지 알고 있는 글자이다.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며, 세계 언어학자들이 찬사를 보내는 이 위대한 글자를 정작 한국인들은 잘 알지 못한다. ‘한글의 과학성’, 그 치밀함과 복잡함은 인류 문자의 정점에 있다고 하지만 왜 그런지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뿌리 깊은 나무』는 한글의 원리를 사건과 밀접하게 관련시킴으로, 책을 다 읽고 난 후엔 자연스럽게 한글의 원리와 우수성을 알게 된다. 한자와 같은 상형문자는 그 수가 많고, 글자를 보아도 음을 알 수 없다. 한자를 자국어로 쓰는 중국조차 문맹률이 높으니 그 배움의 어려움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글은 소리와 글자의 상관관계를 생각해 만든 글자이다.

“어름이옵니다, 눈이옵니다, 가람이옵니다…. 허허… 신묘하지 않으냐? 그 말을 한 사람은 이곳에 없는데 그 했던 말이 그대로 남아 그때를 돌이켜 생각나게 하느니…” 주상은 연신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하옵니다. 이 신묘한 글자는 흐르는 물이 얼되 물의 성질을 잃지 않음같이 제 멋대로 흐르는 말이 굳어 글자가 되었으나 그 소리가 가진 원래 뜻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세종이 가리온의 그림으로 벙어리 소이를 말할 수 있게 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발성 기관이나 그 소리 나는 모습을 가지고 자음은 만들어졌다. ‘ㄱ,ㄴ,ㅁ,ㅅ,ㅇ’의 기본만 알면 획을 더하고 글자를 포개는 방식으로 다른 글자를 만들 수 있다. ‘ㄴ, ㄷ, ㅌ, ㄸ’과 같이 같은 소리에 속하는 글자는 그 생김새까지도 비슷하게 만들어 쉽게 익힐 수 있다. 모음은 어떠한가? 하늘, 땅, 사람을 뜻하는 ‘ㆍ, ㅡ, ㅣ’ 단 이 세 개로 모음 체계를 완성했다. 가장 간단한 모음 체계로 세상 어느 문자보다 많은 모음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한 것이다. 간단한 음절의 조합만으로 글자를 쓸 수 있어 짧은 시간 안에 글자를 익히는 것이 가능한 위대한 글자 한글. 한글에 대한 예찬은 끝이 없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어떤 시대이옵니까?”
“날이 밝는 대로 정음 스물여덟 자를 반포할 것이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다. 그것으로 이 나라는 중국이 아닌 스스로의 혼을 가지게 될 것이다. 백성들은 배우고자 하면 어떤 일이든 배울 수 있을 것이요, 익히고자 하면 무엇이든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의 백성들은 이 땅의 강역에서, 이 땅의 글로 이 땅의 혼을 마음껏 노래할 것이다.”

하지만 세종이 말하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한글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과거엔 일본어에, 현재는 영어에 맥을 못추며 그 모습이 퇴보하고 있다. TV에선 한글날이라며 곳곳에서 특집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프로그램에서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한글의 오염이라는 찹잡한 소식이다. 세종대왕이 무덤에서 울고 있다는 표현이 나온 지 몇 십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말은 유효하다.

 

그렇다고 한글에 대한 안 좋은 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09년 인도네시아 원주민 찌아찌아족이 한글을 수입했으며, 올해 남미 볼리비아 원주민 아이마라 부족과 서울대는 현지 대학과 한글 보급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600년 전 ‘뿌리 깊은 나무’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한글은 문자 없는 원주민에게 전해져 그들의 생각을 우리 글로 적고 있다. 그들의 후손들이 훗날 자신들의 옛 조상 이야기를 한글기록으로 접한다고 생각하니 그 뿌듯함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 나라의 군왕은 이 적요한 침전에서 밤마다 자신을 둘러싼 사방의 적들과 홀로 전쟁을 벌였다. 그 전쟁에 나설 때 주상은 군왕이 아니라 용포를 벗은 맨몸이었다. 이제 의로운 전쟁은 끝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반대자는 적발되었고, 처단될 것이니… 하지만 주상의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주상이 맞선 적은 최만리나 심종수나 강퍅함에 찌든 문신들이 아니었다. 주상은 자신의 앞에 있는 거대한 시대와 정면으로 싸우고 있었다. 불온한 시대, 어둠의 시대, 혼돈의 시대를 물리치고 빛과 융성의 시대를 만들어가야 했다.

시대와 맞서며 융성의 시대를 꿈꾸었던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의 삶은 한글날을 보내는 내 가슴에 저리도록 아픈 감동으로 다가온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가 원작과 그 시대를 어떻게 표현할 지 더욱 궁금해지는 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