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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속으로콜콜Call/옛노래 선율

[노계가집] 가난을 원망 않고 즐기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 박인로「누항사」

누항(陋巷)은 좁고 더러운 거리를 말한다. 원래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학문에 힘쓰며 즐기는 곳이라는 뜻이다.

어질도다, 회여! 거친 한 그릇의 밥과 표주박의 물 한 모금을 가지고 누추한 거리에 살고 있으니,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런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겠지만, 회는 그 즐거움이 변치 않는구나. 어질도다, 회여!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 『논어(論語)』「옹야(雍也)」편

공자는 가난하면서도 남을 원망하지 않고, 그런 처지를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즐기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어진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가난하고 힘들 때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만, 성인을 본받아 군자가 되고자 하는 선비는 그 마음이 다르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좋은 음식과 옷과 집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사느냐 하는 거니까 말이다.

한음대감명작(漢陰大鑑命作)

한음대감께서 명하여 지은 것이다.

「누항사(陋巷詞)」는 한음 이덕형이 박인로를 찾아 왔을 때, 두메 살림의 어려움을 물었는데, 그 대답 대신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두메 살림에는 굶주림과 추위, 수모가 많지만 빈이무원(貧而無怨)하고 자연을 벗 삼아 충효와 형제간의 우애와 벗들과의 신의를 바라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할 뿐이라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어리고 우활(迂闊)  이내 우희 던 이 업다
길흉화복(吉凶禍福)을 하 브텨 두고
누항(陋巷) 깁픈 곳의 초막(草幕)을 주피 혀고
풍조우석(風朝雨夕)의 서근 딥피 서피 되야
닷홉 밥 서홉 죽(粥)에 연기(烟氣)도 하도 할샤
얼머 만히 바 밥의 현순치자(懸鶉稚子)들은
장기(將碁) 버덧 졸(卒) 미덧 나아오니
인정천리(人情天理)예 마 혼자 머글넌가
설더인 숙랭(熟冷)애 뷘  소길 이로다
생애(生涯) 이러다 장부(丈夫) 을 옴길런가
안빈일념(安貧一念)을 져글만졍 품어 이셔
수의(隨宜)로 살려니 날로조차 저어(齟齬)다

어리석고 세상 물정에 어둡기로는 나보다 더한 이가 없다.
길흉화복(운명)을 하늘에 맡겨 두고,
누추한 거리의 깊은 곳에 초가집 조그마하게 지어 두고,
바람 부는 아침 비 내리는 저녁에 썩은 짚이 땔감이 되어,
닷 홀 밥, 세 홀 죽에 연기도 많기도 많구나.
얼마 만에 받은 밥에 누더기 옷을 걸친 어린 자식들은
장기판에서 졸(卒)을 밀어 올리듯 나아오니,
사람의 정과 꼭 지켜야 할 도리에 차마 혼자 먹을 수 있으랴?
설 데운 숭늉에 빈 배 속일 뿐이로다.
살림살이가 이렇게 어렵다 하여 장부가 품은 뜻을 바꿀 것인가?
가난할망정 편안히 살고자 하는 마음을 적을 만정 품고 있어서
옳은 일을 좇아 살려 하니 날이 갈수록 뜻대로 되지 않는다.

‣ 우활(迂闊) :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음. 세상 물정에 어두움.
‣ 이내 우희 던 이 업다 : 이내 몸 위에 더한 이가 없다.
‣ 브텨 두고 : 심정을 의탁하고. 맡겨두고.
‣ 누항(陋巷) : 좁고 지저분하며 더러운 거리. 자기가 사는 거리나 동네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 [어질도다, 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가지고 누추한 거리에 살고 있으니,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런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겠지만, 회는 그 즐거움이 변치 않는구나. 어질도다, 회여!(子曰, “賢哉, 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 출전 : 『논어(論語)』「옹야(雍也)」편]
‣ 초막(草幕) : 조그마하게 지은 초가의 별장.
‣ 주피 혀고 : 조그마하게 짓고.
‣ 풍조우석(風朝雨夕)의 : 바람 부는 아침 비 내리는 저녁에. 고르지 못한 날씨에.
‣ 서근 딥피 : 썩은 짚이.
‣ 서피 되야 : 섶[薪]이 되어. 땔감이 되어.
‣ 얼머 만히 : 얼마나 많이. 또는 얼마 만에.
‣ 현순치자(懸鶉稚子) : 누더기 옷을 걸친 어린 자식.
‣ 장기(將碁) 버덧 : 장기짝을 벌여 놓은 듯.
‣ 졸(卒) 미덧 : 장기의 졸을 밀어 올리듯.
‣ 인정천리(人情天理)예 : 사람의 정과 꼭 지켜야 할 도리에.
‣ 옴길런가 : 옮길 것인가? 바꿀런가?
‣ 안빈일념(安貧一念) : 비록 가난할망정 편안히 여기고 근심하지 않으며 살고자 하는 마음. 安分一念(안분일념).
‣ 수의(隨宜) : 옳은 일을 좇음.
‣ 날로조차 : 날을 따라. 날이 갈수록.
‣ 저어(齟齬)다 : 서로 맞지 않고 어긋나 뜻대로 되지 않음. ‘저어(齟齬)’는 원래 윗니와 아랫니가 서로 맞지 않아 어긋난다는 뜻이다.

히 부족(不足)거든 봄이라 유여(有餘)며
주머니 뷔엿거든 병의라 담겨시랴
다 나 뷘 독 우희 어론털 덜 도든 늘근 쥐
탐다무득(貪多務得)야 자의양양(恣意揚揚)니 백일(白日) 아래 강도(强盜)로다
아야라 어든 거 다 교혈(狡穴)에 앗겨두고
석서(碩鼠) 삼장(三章)을 시시(時時)로 음영(吟詠)며
탄식무언(歎息無言)야 소백수(搔白首)니로다
이 중(中)에 탐살은 다 내 집의 모홧다
고초(苦楚) 인생(人生)이 천지간(天地間)의 나이라

가을이 부족하거든 봄이라고 넉넉하며,
주머니가 비었거든 술병이라고 (술이) 담겨 있겠느냐?
다만 하나 빈 독 위에 수염 덜 난 늙은 쥐는
탐욕이 많아 무엇이든 얻으려고 제멋대로 방자한 기세를 올리니 대낮의 강도로구나.
겨우 얻은 것을 다 쥐구멍에 빼앗겨 버리고,
석서(碩鼠) 삼장(三章)을 때때로 읊조리며,
탄식만 하고 말은 하지 못하며 흰 머리를 긁을 뿐이로다.
이 가운데 탐심이 많은 악귀는 다 내 집에 모였구나.
어렵고 괴로운 인생이 이 세상에 나뿐이로다.

‣ 어론털 : 어른털. 수염을 뜻함.
‣ 탐다무득(貪多務得) : 탐욕이 많아 어떤 것이건 얻으려 힘씀.
‣ 자의양양(恣意揚揚) : 제멋대로 방자한 생각을 가지고 기세를 올림.
‣ 백일(白日) : 구름이 없이 태양이 쨍쨍하게 비치는 날. 한낮.
‣ 아야라 : 겨우[纔].
‣ 교혈(狡穴) : 간교한 구멍. 곧 쥐구멍.
‣ 앗겨두고 : 빼앗기어 비리고.
‣ 석서(碩鼠) 삼장(三章) : 『시경(詩經)』「국풍(國風)」<위풍(魏風), 석서(碩鼠)>에 나오는 시로, 탐관오리들을 비판한 것이다. 가렴주구를 견디다 못한 위(魏)나라의 백성들이 낙토(樂土)를 찾아 유리(流離)⋅걸식(乞食)하는 모습을 참담하게 표현하였고, 새로운 세상을 찾아가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여기서는 쥐를 물리치기 위하여 「석서장」을 읊었다.

碩鼠碩鼠(석서석서) 無食我黍(무식아서) 큰 쥐여, 큰 쥐여! 내 기장을 먹지 마라.
三歲貫女(삼세관여) 莫我肯顧(막아긍고) 삼년동안 알고 지냈거늘, 나를 돌보지 않는구나.
逝將去女(서장거여) 適彼樂土(적피락토) 너를 떠나 멀리 가, 저 즐거운 땅으로 가리라
樂土樂土(락토락토) 爰得我所(원득아소) 락토(樂土)여, 락토(樂土)여! 내 살 곳을 찾으리라.

碩鼠碩鼠(석서석서) 無食我麥(무식아맥) 큰 쥐여, 큰 쥐여! 내 보리를 먹지 마라.
三歲貫女(삼세관녀) 莫我肯德(막아긍덕) 삼년동안 알고 지냈거늘, 내게 은덕은 베풀지 않는구나!
逝將去女(서장거여) 適彼樂國(적피락국) 너를 떠나 멀리 가, 저 즐거운 나라로 가리라.
樂國樂國(락국락국) 爰得我直(원득아직) 락국(樂國)이여, 락국(樂國)이여! 나의 좋은 곳을 얻으리라.

碩鼠碩鼠(석서석서) 無食我苗(무식아묘) 큰 쥐여, 큰 쥐여! 내 싹을 먹지 마라.
三歲貫女(삼세관여) 莫我肯勞(막아긍로) 삼년동안 알고 지냈거늘, 나를 위로하려 하지 않는구나!
逝將去女(서장거여) 適彼樂郊(적피락교) 너를 떠나 멀리 가, 저 즐거운 교외로 가리라.
樂郊樂郊(락교락교) 誰之永號(수지영호) 락교(樂郊)여, 락교(樂郊)여! 누구 때문에 길이 부르짖으리오.

‣ 탄식무언(歎息無言) : 탄식만 하고 말은 하지 못함.
‣ 소백수(搔白首) : 흰 머리를 긁음.
‣ 탐살 : 貪煞. 탐심이 많은 악귀.
‣ 모홧다 : 모이었구나.
‣ 고초(苦楚) : 어렵고 괴로운.

기한(飢寒)이 절신(切身)다 일단심(一丹心)을 니즐런가
분의망신(奮義忘身)야 주게야 말려 너겨
우탁우낭(于槖于囊)의 줌줌이 뫼화 녀코
병과(兵戈) 오재(五載)예 감사심(敢死心)을 가져 이셔
이시보혈(履尸踄血)여 몃 백전(百戰)을 디내연고

굶주림과 추위가 몸을 괴롭힌다고 한들, 한 가닥 굳은 마음을 잊을 것인가?
옳은 일에 분발하여 내 몸을 잊고 죽어야 그만두리라 생각하여,
전대와 망태에 한 줌 한 줌 모아 넣고,
임진왜란 5년 동안에 죽고야 말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주검을 밟고 피를 건너는 혈전을 몇 백전이나 지내었는가?

‣ 기한(飢寒)이 절신(切身)다 : 굶주림과 추위가 몸을 끊는다고 하여.
‣ 분의망신(奮義忘身) : 의로운 일에 분발하여 제 몸을 돌보지 않음.
‣ 말려 너겨 : 말려고 여겨. 말겠노라고 마음먹어.
‣ 우탁우낭(于槖于囊) : 전대와 망태. 주머니. [篤公劉(독공류) 匪居匪康(비거비강) 迺埸迺疆(내역내강) 迺積迺倉(내적내창) 迺裹餱糧(내과후량) 于槖于囊(우탁우낭) 思輯用光(사집용광) 弓矢斯張(궁시사장) 干戈戚揚(건과척양) 爰方啓行(원방계행) : 후덕하신 공류가 편안히 거처하지 않으사,  밭두둑을 만들고 경계를 만들어서 노적을 쌓고 곳집에 쌓거늘, 마른 쌀과 음식을 전대와 자루에 넣어 싣고, 사람들을 모아 국가를 빛낼 것을 생각하여 활과 화살을 장만하고, 건과(干戈)와 척양(戚揚)으로 이에 비로소 길을 떠나시니라. - 출처 : 『시경(詩經)』「대아(大雅)」<공유(公劉)>]
‣ 줌줌이 : 한 줌 한 줌.
‣ 병과(兵戈) : 병정과 창. 곧 전쟁을 뜻함. 여기서는 임진왜란.
‣ 오재(五載) : 5년.
‣ 감사심(敢死心) : 감히 죽겠다는 마음. 곧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 이시보혈(履尸踄血) : 주검을 밟고 피를 건너감.

일신(一身)이 여가(餘暇) 잇사 일가(一家)를 도라보랴
일노장수(一奴長鬚) 노주분(奴主分)을 니젓거든
고여춘급(告余春及)을 어 이 각리
경당문노(耕當問奴) 눌려 무런고
궁경가색(躬耕稼穡)이 내 분(分)인 줄 알리로다
신야경수(莘野耕叟)와 농상경옹(壟上耕翁)을 천(賤)타 리 업건마
아므리 갈고젼 어 쇼로 갈니손고

이 몸이 겨를이 있어서 일가(一家)를 돌보겠는가?
늙은 종은 종과 주인간의 분수를 잊었거든,
나에게 봄이 왔다고 일러 주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발 가는 것을 종에게 물어야 한다지만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몸소 밭 갈고 농사를 짓는 것이 나의 분수인 줄 알겠도다.
들에서 밭 갈던 은나라의 이윤과 진나라의 진승을 천하다고 할 사람이 없건마는
아무리 갈고자 한들 어느 소로 갈 것인가?

‣ 일노장수(一奴長鬚) : 긴 수염이 난 늙은 종. [玉川先生洛城裏(옥천선생낙성리) 破屋數間而已矣(파옥수간이이의) 一奴長鬚不裹頭(일노장수불과두) 一婢赤脚老無齒(일비적각노무치) 낙양성 안 옥천 선생은, 부서진 집 몇 간이 있을 뿐이다. 하나 있는 종도 수염이 길고 머리도 싸지 못하고, 하나 있는 하녀는 맨발에 늙어서 이가 하나도 없다. - 출처 : 한유(韓愈)「기노동(寄盧仝)」 중에서]
‣ 노주분(奴主分) : 종과 주인간의 분수.
‣ 고여춘급(告余春及) : 나에게 봄이 돌아왔음을 알려줌. [悅親戚之情話(열친척지정화) 樂琴書以消憂(낙금서이소우) 農人告余以春及(농인고여이춘급) 將有事於西疇(장유사어서주) 친한 이웃과 이야기 나누며 기뻐하고, 거문고와 글을 즐기며 시름을 삭이리.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음을 알리니, 서쪽 밭에 나가서 일을 하려네. - 도연명(陶淵明)「귀거래사(歸去來辭)」중에서]
‣ 어 이 각리 : 어느 사이에 생각할 것인가?
‣ 경당문노(耕當問奴) : 밭가는 일은 마땅히 종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모름지기 모든 일은 그 일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과 의논해야 한다는 말이다. [耕當問奴 織當問婢 밭 갈기는 마땅히 사내종에게 물어보고, 베 짜기는 마땅히 계집종에게 물어보라. - 출전: 『宋書(송서)』「沈慶之傳(심경지전)」]
‣ 궁경가색(躬耕稼穡) : 몸소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곡식을 거둠. 곧 몸소 농사를 지음.
‣ 신야경수(莘野耕叟) : 초야에서 밭 갈던 늙은이로 이윤(伊尹)을 가리킴. 이윤은 은(殷) 나라 초대 왕인 탕왕(湯王)의 어진 정승으로, 이름이 이(伊)고, 윤(尹)은 관직 이름이다. 탕왕이 세신초(細辛草, 잡초)가 많이 난 들에서 농사짓고 있던 이윤을 세 차례 사람을 보내 그를 초빙했고, 재상이 되어 하(夏) 나라 걸왕(桀王)을 쳐서 탕왕으로 하여금 천하의 왕이 되게 했다.
‣ 농상경옹(壟上耕翁) : 밭두둑에서 밭 갈던 늙은이로 진승(陳勝)을 가리킴. 진승은 중국 진(秦) 말기의 농민 반란 지도자로서 원래 신분이 비천하여 남에게 고용되어 농사에 종사했다. 한(漢)이 천하를 통일한 뒤에 은왕(隠王)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한기태심(旱旣太甚)야 시절(時節)이 다 는즌 제
서주(西疇) 노픈 논애 잠 갠 녈비예
도상무원수(道上無源水) 반만 대혀 두고
쇼  적 주마 고 엄섬이 말
친졀호라 너긴 집의  어ㅂ슨 황혼(黃昏)의 히위허위 라가셔
구지 다 문 밧긔 어득히 혼자 셔셔
큰 기츰 아함이 양구(良久)토록 온 후(後)에
어와 긔 뉘신고 염치(廉恥)업슨 내옵니
초경(初更)도 거읜 긔 엇디 와 겨신고
연년(年年)의 이렁기 죽고져도 건마
쇼 업슨 이 몸이 혜염 만하 왓이다

가뭄이 이미 몹시 심하여 농사철이 다 늦은 때에,
서쪽 밭두둑이 높은 논에 잠깐 내리고 개어버린 지나가는 비에,
길 위에 흘러내리는 물을 반쯤 대어 두고,
“소 한 번 빌려 주겠다.” 하는 탐탁지 않게 말하여
친절하다고 여긴 집에 달도 없는 황혼에 허둥지둥 달려가서,
굳게 닫은 문 밖에 멀찍이 혼자 서서
큰 기침 “에헴” 소리를 꽤 오래도록 한 뒤에,
“아, 그 누구이신가?”하고 묻는 말에 “염치없는 저올시다.”하고 대답하니,
“초경도 거의 지났는데 그대 어찌하여 와 계신가?” 하기에,
“해마다 이러하기가 염치없는 줄 알건마는
소 없는 이 몸이 걱정 많아 왔소이다.”

‣ 한기태심(旱旣太甚) : 가뭄이 이미 크게 심함.
‣ 도상무원수(道上無源水) : 길 위에 흘러내리는 근원 없는 물. 곧 조금 온 빗물.
‣ 엄섬이 : 엉성히. 탐탁하지 않게.
‣ 히위허위 : 허우적허우적. 허둥지둥.
‣ 어득히 : 아득히.
‣ 아함이 : “에헴!” 하는 인기척 소리.
‣ 양구(良久)토록 : 꽤 오래도록.
‣ 초경(初更) :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눈 첫째 때.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
‣ 혜염 만하 : 생각이 많아서. 근심이 많아서.

공니나 갑시나 주엄즉도 다마
다 어젯밤의 건넌집 뎌 사이
목 블근 슈기치(雉)을 옥지읍(玉脂泣) 구어내고
 니근 삼해주(三亥酒) 취(醉)토록 권(勸)거든
이러 은혜(恩惠) 엇디 아니 갑런고
내일(來日)로 주마 고 큰 언약(言約)얏거든
실약(失約)이 미편(未便)니 셜이 어려웨라
실위(實爲) 그러면 혈마 어이 고
헌 벙덕 수기 혀고 측 업슨 딥신에 설픠설픠 믈러오니
풍채(風彩) 져근 형용(形容)에 개 스실 이로다

“공짜로나 값을 치르거나 해서 줄만도 하다마는,
다만 어젯밤에 건넛집 저 사람이
목 붉은 수꿩을 구슬 같은 기름이 끓어오르게 구워내고,
갓 익은 삼해주(三亥酒)를 취하도록 권하였거든,
이러한 은혜를 어찌 아니 갚지 않겠는가?
‘내일 소를 빌려 주마’ 하고 굳게 언약을 하였거든,
약속을 어김이 편안하지 못하니 말씀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사실이 그러하면 설마 어찌하겠는가?”
헌 멍덕을 숙여 쓰고, 축 없는 짚신을 신고 맥없이 물러나오니
풍채 작은 내 모습에 개만이 짖을 뿐이로다.

‣ 공니나 갑시나 : 공짜거나, 값을 받거나.
‣ 슈기치(雉) : 수꿩. 장끼.
‣ 옥지읍(玉脂泣) : 구슬 같은 기름이 끓어오르게.
‣ 삼해주(三亥酒) : 동짓달 해일(亥日)에 준비하여 섣달 해일에 술을 담갔다가 정월 해일에 거른 술. 고려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궁중술로, 양곡이 많이 들어가고 증류하여 얻는 소주가 적어 고급술에 속한다.
‣ 실약(失約)이 미편(未便)니 : 약속을 어기기가 편하지 못하니(부당하니)
‣ 혈마 : 설마.
‣ 헌 벙덕 : 헌 멍덕. ‘멍덕’은 벌통 위를 덮는 재래식 뚜껑. 짚으로 틀어서 바가지 비슷하게 틀어 만듦.
‣ 설픠설픠 : 기운 없이. 맥없이.

와실(蝸室)에 드러간 이 오사 누어시랴
북창(北窓)을 비겨 안자 새배 기리니
무정(無情) 대승(戴勝)은 이내 한(恨)을 뵈아다
종조추창(終朝惆悵)며 먼 들홀 라보니
즐기 농가(農歌)도 흥(興)업서 들리다
세정(世情) 모 한숨은 그칠 주 모로다
술 고기 이시면 권당 벗도 하련마
두 주먹 뷔게 쥐고 세태(世態) 업슨 말애 양 나 못 괴오니
 아젹 블릴 쇼도 못 비러 마랏거든
며 동곽반간(東郭磻間)의 취(醉) 들 가질소냐
앗가온 쇼보 볏보십도 됴셰고
가 엉긘 무근 밧도 불 업시 갈련마
허당반벽(虛堂半壁)의 쓸  업시 걸련다
하리 첫봄의 라나 릴 거
이제야 려 알 리 잇사 사라오랴
춘경(春耕)도 거의거다 후리텨 더뎌 두쟈

작고 누추한 집에 들어간들 잠이 와서 누워 있으랴?
북쪽 창문에 기대어 앉아 새벽을 기다리니,
무정한 오디새는 나의 한을 재촉하는구나.
아침이 마칠 때까지 슬퍼하며 먼 들을 바라보니
즐기는 농부들의 노래도 흥이 없이 들리는구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한숨은 그칠 줄을 모른다.
술 고기 있으면 일가친척 벗도 많으련마는,
두 주먹 비게 쥐고 세태인정 없는 말씀에 내 모양 하나 유지하지 못하니,
하루 아침나절 부릴 소도 못 빌리고 말았거든,
하물며 동쪽 외곽의 무덤 사이에 취할 뜻을 가질쏘냐?
아까운 쟁기는 볏 보습도 좋구나!
가시가 엉긴 묵은 밭도 뿌리 없이 갈 수 있으련마는,
텅 빈 집 벽 가운데 쓸데없이 걸렸구나!
차라리 첫봄에 팔아나 버릴 것을
이제야 팔려한들 알 사람 있어 사러오랴?
봄갈이도 거의 지났다. 팽개쳐 던져두자.

‣ 와실(蝸室): 달팽이 집, 곧 초라한 거처. 작은 집.
‣ 비겨 안자 : 의지하여 앉아.
‣ 대승(戴勝) : 오디새.
‣ 종조추창(終朝惆悵) : 아침이 마칠 때까지 슬퍼함.
‣ 권당 : 捲堂. 일가친척.
‣ 못 괴오니 : 못 괴니. 지탱하지 못하니. 유지하지 못하니.
‣ 동곽반간(東郭磻間) : 동쪽 외곽의 무덤 사이. 『맹자(孟子)』「이루하(離婁下)」에서 언급한 말로, 맹자는 권력자 주위에 빌붙어서 부귀를 추구하던 이를 제사 지내고 남은 음식을 비굴한 웃음으로 구걸해서 배를 채우고 배부름을 으시대는 사람으로 비유하며, 비판하고 있다. [蚤起, 施從良人之所之, 徧國中無與立談者。卒之東郭墦間之祭者, 乞其餘。 不足, 又顧而之他, 此其爲饜足之道也。일찍 일어나 남편의 가는 곳을 몰래 따라 갔는데, 온 나라 안을 두루 다녀도, 같이 서서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마침내 동쪽 성 밖의 무덤 사이에 제사지내는 사람에게 가서 남은 음식들을 구걸하고, 족하지 않으면 또 돌아보아 다른 데로 가니, 이것이 그 물리도록 배불리 먹는 방법이었다.]
‣ 쇼보 : 소부. 쟁기의 사투리. 쟁기는 논밭을 가는 농기구의 하나.
‣ 볏 : 쟁기의 날 위에 비스듬히 대어 흙이 한 쪽으로 떨어지게 하는 쇠.
‣ 보십 : 보습. 쟁기나 극젱이의 술바닥에 맞추는 삽 모양의 쇳조각.
‣ 허당반벽(虛堂半壁) : 빈 집의 벽 가운데.
‣ 거의거다 : 거의 지나버렸다.
‣ 후리텨 : 팽개쳐.

강호(江湖)  을 언 디도 오라더니
구복(口腹)이 원수(怨讐)이 되야 어지버 니젓덧다
첨피기오(瞻彼淇澳)혼 녹죽(綠竹)도 하도 할샤
유배군자(有裴君子)아 낟대 나 빌려라
노화(蘆花) 기픈 고대 명월청풍(明月淸風) 버디 되야
님재 업슨 풍월강산(風月江山)의 절로절로 늘그리라
무심(無心) 백구(白鷗)야 오라 며 갈아 랴
토리 업슬 다 인가 너기노라

자연을 벗 삼아 살겠다는 꿈을 꾼 지도 오래되었는데,
먹고 마시는 것이 원수가 되어, 아아! 슬프게도 잊었도다.
저 기수의 물가를 바라보는데 푸른 대나무도 많기도 많구나!
교양 있는 선비들아, 낚싯대 하나 빌려 다오.
갈대꽃 깊은 곳에 밝은 달과 맑은 바람이 벗이 되어,
임자 없는 풍월강산에 절로절로 늙으리라.
무심한 갈매기야 나더러 오라고 하며 가라고 하겠느냐?
다툴 이가 없는 것은 다만 이것뿐인가 여기노라.

‣ 구복(口腹)이 원수(怨讐)이 되야 : 입과 배가 위태로워. 곧 먹고 살기 바빠서. ‘구복(口腹)’은 입과 배, 입에 풀칠하는 것.
‣ 어지버 : 아아! 슬프다(감탄사)
‣ 첨피기오(瞻彼淇澳)혼 : 저 기수(淇水)의 기슭을 바라보는데. 시경의 한 구절[瞻彼淇澳,菉竹猗猗。有斐君子,如切如磋,如琢如磨。저 기수의 물굽이 바라보니, 푸른 대가 무성하다. 의젓하신 군자여! 깎은 듯하고 다듬은 듯하며, 쪼은 듯하고 갈아낸 듯하도다. - 『시경(詩經)』〈衛風.淇奧〉]. 여기서는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니.
‣ 유배군자(有裴君子)아 : 교양 있는 선비들아. 훌륭한 군자. 밝게 빛나는 군자.
‣ 노화(蘆花) : 갈대.
‣ 백구(白鷗) : 갈매기.
‣ 토리 : 다툴 사람.

이제야 쇼 비리 맹서(盟誓)코 다시 마쟈
무상(無狀) 이 몸이 므슴 지취(志趣) 이시리마
두세 이렁 밧 논을 다 무겨 더뎌 두고
이시면 쥭이오 업스면 굴믈만졍
의 집 의 거 젼혀 불어 말련노라
내 빈천(貧賤) 슬히 너겨 손을 헤다 믈러가며
의 부귀(富貴) 불이 너겨 손을 티다 나아오랴
인간(人間) 어 이리 명(命) 밧긔 삼겨시리
가난타 이제 주그며 가며다 백년(百年) 살라
원헌(原憲)이 몃 랄 살고 석숭(石崇)이 몃  산고
빈부(貧富) 업시 다 주그니 주근 후에 던 이 업다
빈이무원(貧而無怨)을 어렵다 건마
내 사리 이러호 셔론  업노왜라
단사표음(簞食瓢飮)을 이도 족(足)히 너기노라
평생(平生)  디 온포(溫飽)에 업라
태평천하(太平天下)애 충효(忠孝) 이 삼아
화형제(和兄弟) 붕우유신(朋友有信) 외다 리 져글션졍
그 밧긔 녀나 이리야 삼긴 대로 살련노라

이제는 소 빌리기를 맹세코 다시 말자.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무슨 소원이 있겠는가마는
두세 이랑 되는 밭과 논을 다 묵혀 던져두고,
있으면 죽이요, 없으면 굶을망정
남의 집, 남의 것은 전혀 부러워하지 않겠노라.
나의 빈천함을 싫게 여겨 손을 헤친다고 물러가며,
남의 부귀를 부럽게 여겨 손을 친다고 나아오랴?
인간 세상의 어느 일이 운명 밖에 생겼겠느냐?
가난하다고 금방 죽으며 부유하다고 백 년을 살겠는가?
원헌(原憲)이는 몇 날 살고, 석숭(石崇)이는 몇 해 살았나?
빈부(貧富) 없이 다 죽으니 죽은 후에 더한 이가 없다.
가난하여도 원망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고 하지마는,
내 생활이 이러하되 서러운 뜻은 없도다.
대나무 도시락의 밥을 먹고,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는 어려운 생활도 만족하게 여기노라.
평생의 한 뜻이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데에는 없노라.
태평스런 세상에 충성과 효도를 일로 삼아,
형제간에 화목하고 벗끼리 신의 있게 사귀는 일을 그르다고 할 사람이 적을 것이지만,
그 밖에 나머지 일이야 생긴 대로 살아가겠노라.

‣ 쇼 비리 : 소 빌리는 일.
‣ 무상(無狀) : 못난. 못생김. 예모(禮貌) 없는.
‣ 지취(志趣) : 의지와 취향. 뜻. 소원.
‣ 가며다 : 가멸다. 부요하다.
‣ 원헌(原憲) : 춘추 시대에 청빈(淸貧)하게 산 학자. 공자의 제자인 가난했던 자사(子思).
‣ 석숭(石崇) : 진(晉)나라 때의 큰 부자.
‣ 빈이무원(貧而無怨) : 가난하지만 원망하지 않음. 또는 그런 태도. [貧而無怨難 富而無驕易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는 어렵지만, 부자이면서 교만하지 않기는 쉽다. - 『논어(論語)』「헌문(憲問)」]
‣ 사리 : 생활이.
‣ 단사표음(簞食瓢飮) : ‘단사’는 대나무 도시락의 밥, ‘표음’은 표주박의 물로 변변치 못한 음식을 가리키는 뜻으로 매우 가난한 살림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 온포(溫飽) :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음. 물질적 만족.